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판 Mar 01. 2023

마음이 머무는 곳

어느 택시기사님과의 짧은 만남으로 얻은 생각들

  택시를 탔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20분가량 기다려야 했는데, 성격 급한 남편은 기다리느니 택시를 타고 가기를 원했고, 카카오 택시를 불렀던 것이다.

  택시 기사님은 나이가 지긋한 분이셨는데, 우리 가족이 한 달 전부터 살기 시작한 아파트 단지에 큰 관심을 보이셨다. 왜 그런가 했더니 큰아들이 우리 옆 단지에 입주했기 때문이었다. 이사한 지 며칠 안돼 아직 가보지 못했다고 하셨다. 가는 김에 한번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며느리가 불편해할 것을 생각하여 꾹 참는 듯했다. 기사님은 목적지까지 가는 10여분 동안 자식과 손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싱글벙글 거리셨다. 우리가 입주한 지역에 대해 마치 입주민처럼 같은 내용을 걱정하고, 같은 기대감을 가진 것처럼 이야기하셨다. 아무 관심도 없던 장소가 가장 중요한 장소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소중한 존재가 머문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집 앞에 도착하여 택시에서 내린 우리는 그 자리에 잠시 머물며 떠나는 택시를 바라보았다. 과연 아들의 집이 있는 아파트를 바로 옆에 두고 그냥 가실 것인지 궁금했다. 택시는 아들네가 산다는 아파트 주차장 입구에서 잠시 멈추어있다가 서서히 멀어져 갔다. 아들 집을 향하는 마음을 꾹 참고 발길을 돌리신 것이다.

  택시에 호출신호가 떴을 때 기사님은 도착지가 아들이 있는 아파트단지 쪽인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응답버튼을 누르셨을지도 모른다. 아, 그곳?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기사님의 마음 한켠은 앞으로 두고두고 이곳에 머물겠구나 싶은 마음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사람은 자신에게 소중한 어떤 존재가 있는 곳, 혹은 추억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고, 잠시라도 머물고 싶어 진다. 가족과 함께 했던 곳, 자녀가 다니고 있는 학교, 부모님이 사시는 집, 형제가 사는 지역, 친구가 사는 곳 등. 부모님이 묻힌 곳은 또 얼마나 중요한 장소가 되던가. 자동차를 타고 그곳을 지나가기만 해도 그 사람이 떠오르고, 그 장소가 떠오른다. 하다못해 길고양이를 만났던 곳도 다시 가면 혹 그 고양이를 만나지 않을까 기대감을 갖게 된다. 때로는 단 한번 가보았던 장소가 평생토록 가장 그리운 곳이 되기도 한다.  마음을 주는 곳에 마음이 머문다.


  내 마음은 조금씩 새 집에 머물기 시작하고 있다. 입주한 지 한 달쯤 되니 이제 정신이 들고, 불편한 점도 많지만 감수하겠다는 마음이 들면서 앞으로 이곳이 내가 오래 머물 곳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사 와서 얼마간은 전에 살던 곳의 편리한 교통과 병원이나 학원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는 주변환경이 그리웠다. 물론 그곳에서의 추억들도. 내 마음이 완전히 그곳을 떠나오지 못한 것이다. 오랫동안 몸담았던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도 얼마간은 내 마음 한 켠이 직장의 내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가끔씩 그곳이 생각났다. 간혹 꿈에 전에 다니던 직장과 직업이 등장하는 것은 오랜 세월 내 삶의 일부였던 곳에 대한 추억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이 평생토록 내 마음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물론 좋지 못한 기억으로 마음이 머무는 장소들도 있다. 이를테면 교통사고가 났던 곳이라던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불쾌한 경험을 했던 곳. 그런 곳을 지날 때면 마음을 한시도 머물게 하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기억이 떠오른다. 괴로운 경험이 있던 곳도 마음속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어디 장소뿐이랴. 어떤 음악은 내 마음속 깊은 곳, 보이지 않는  지점에 남아 두고두고 나를 설레게 하고 기쁘게 하고, 가끔은 슬프게도 하지 않던가. 책, 그림 혹은 영화로 만나서 내 마음을 차지하는 것들도 있다. 그러고 보면 내 마음이 머무는 곳들은 내 삶의 흔적들이다.


  우연히 탔던 택시 기사님과의 짧은 대화가 나로 하여금 이렇게 많은 생각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낯선 이와는 말을 잘 섞지 않는 편인데, 기사님이 스스럼없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과 기쁨, 행복감이 전해졌기 때문이리라.


  마음 한켠을 차지하는 그곳을 소중히 여기자. 내 마음에 좋은 흔적을 남긴 그곳을 추억하자.

슬픔으로, 아픔으로 다가오는 곳은 떠나보내자. 나를 위해서.  권태와 절망에 내 마음을 내어주지 말자.

내 마음의 자리는 한정돼 있으니. 감사가, 감동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하자. 기쁨을 위해 내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자. 그리하여 내 마음이 머무는 곳이 행복한 곳이 되게 하자. 나 자신에게도, 나와 함께 한 사람에게도.






작가의 이전글 엄마가 만든 음식보다 배달음식을 더 좋아하는 아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