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하는 책이라는 것 외에는 어떤 정보도 없어서 책의 5분의 1을 읽을 때까지 단편소설집이라는 것을 몰랐다. 아둔한 나는 매번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들에 의아해하면서 왼 손에 쥔 페이지가 제법 도톰해질 때까지 읽어나갔더랬다.
이 책은 17개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사실적이고 관조적이다.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을 법한 일들이 레이먼드 카버의 손에서 덤덤하게 또는 서늘하게 장면화되어 그려지고 있다. 현대인의 일상을 스냅사진처럼 포착하고 현미경처럼 해부했다는 평은 정확했다. 우리는 그것을 영화감상하듯, 내 눈앞에 일어나는 일처럼, 불안하면서도 불편하게 지켜보면 되는 것이다.
남편의 외도를 확인하고 망가져가는 아내, 그런 아내에게 지쳐가는 남편, 회복하려고 노력하지만 다시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부부의 이야기 <정자>
아버지의 외도 사실에 대해 듣는 아들의 이야기-외도의 과정을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사실과 감정을 주욱 나열해 놓은 느낌이다. 감정의 끓는점과 어는점 따위 없이, 무미건조하게 화면을 훑을 뿐이었다. 공항 라운지에서 잠깐 만난 아버지에게서 외도 이야기를 듣는 아들의 시선과 말투 또한 흥분하거나 격앙되지 않고 그저 잠잠할 뿐이다. <봉지>
생일을 맞은 아이의 교통사고로 평화롭던 가족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부모의 감정 변화나 행동에 극적인 요소가 단 한 톨도 없다. 그래서 더 피부에 와닿는다. <목욕>
늘 대던 곳에 다른 차가 대어져 있고, 늘 앉던 곳에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어 미묘하게 신경이 긁혔던 경험 다들 한번씩은 있을 것이다. 그런 날에는 되던 것도 안 되고, 안 되는 것은 더 안 되는 법이다. 그렇게 불운은 기어코 나를 비켜가지 않고 진득이 들러붙는다. <청바지 다음에>
아이 있는 이혼 부부의 끊임없는 반목과 경멸, 애증의 이야기 <심각한 이야기>
아픈 아기를 두고 잡은 약속을 이행하러 나가려는 남편과 그것을 만류하는 아내, '칼과 우리 중에 선택해. 진담이야' 이런 말 한번쯤 안 해본 사람 없을 것이고 안 들어본 사람도 없을 것이다. 불과 몇 해 전 남편과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슬며시 웃음이 일었다. <그에게 달라붙어 있는 모든 것>
여자의 발목을 잡은 채 질질 끌고 다니며 사랑 고백을 하는 남자가 있다. 그 발목의 주인인 여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묻는다.
"그런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재혼으로 이루어진 남녀 멜과 테리, 그리고 닉과 로라가 멜의 집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중 '사랑'이 화두에 오르면서 비롯된 질문이었다.
그것은 테리의 전남편 에드의 이야기이다. 결국 테리를 잃은 그는 재혼한 멜과 테리를 수시로 협박하다가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문제는 테리가 그가 한 것이 "사랑"이라고 인식한다는 데에 있었다.
근거는 그 때문에 기꺼이 죽으려고 했고, 실제로도 그 때문에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멜은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죽은 이유를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멜은 이야기한다.
한때 목숨보다도 더 사랑했던, 그리고 지금은 혐오의 대상일 뿐인 전처에 대해, 시간에 흐름에 따라, 상황에 따라 순식간에 얼굴을 바꾸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리 높은 밀도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언젠가는 균열이 생기는, 해도 해도 존재의 성질을 확신할 수 없는 '그것'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