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행위는 비교적 쉽다는 것과 쓰는 행위가 읽는 행위의 딱 두 배만큼의 뇌 용량을 필요로 한다는 것, 생각했던 것보다 내 머리의 상태가 더 좋지 못하다는 것, 그리고 도서관 출근에 있어 나와 1,2등을 다투는 한 청년을 그동안 딱한 눈으로 바라봤었는데 오늘 우연히 스쳐 지나갔던 그 청년의 눈빛에서 나와 동일한 그 무언가를 읽을 수 있었다는 점 등이다.
책의 사실관계와 그 속에서 포착한 것, 착안한 점 등을 쓰려고 다 읽은 책을 뒤적일 때는, 마치 남편과의 열띤 싸움 끝에 다시 먹어야 하는 음식이 놓인 식탁 앞에 앉은 느낌이 들었다. 축축하게 다 식은 음식을, 마저 해치워야 하는 의무감에 꾸역꾸역 삼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지금도 물론 그렇다. 책을 다 읽고 '참 재밌었어. 그렇지?'하고 한쪽 눈을 찡긋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은 책 읽기와 글쓰기가 내 삶을 구원할 것 같지는 않다.
<책 읽기는 재밌다. 읽은 책 리뷰 쓰는 건 재미없다. 그런데 리뷰 글을 읽는 건 재미있다.>
이것이 한 달간 책을 읽고 글을 쓴 나의 소감이다.
또 한 달 뒤, 반년 뒤, 일 년 뒤에는 좀 다르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거미여인의 키스는,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으로 구속된 37살 동성애자 몰리나와 반독재 게릴라 활동으로 수감된 26살 정치범 발렌틴의 옥중 대화로 구성된 책이다.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가 책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첫 번째 영화 이야기> 사랑하는 사람의 키스를 받으면 표범으로 변해 상대를 죽이게 되는 여자의 이야기로, 사랑을 상실한 여자가 동물원에 갇힌 표범을 풀어주고 그에게 찢기면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 영화 이야기> 나치와 사랑에 빠진 여인 레니의 이야기이다. 프랑스 여가수 레니는 그녀의 조국을 점령한 독일군 장교를 사랑하게 되는데, 그런 그녀에게 마키단은(독일군의 반대세력) 독일군의 병기창고의 위치를 알아내라고 압박한다.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사촌동생이 마키단에게 희생당하면서 역으로 독일군이 마키단의 본거지를 찾아내는데 도움을 주고, 레니는 마키단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세 번째 영화 이야기> 전쟁으로 얼굴이 흉측하게 망가진 젊은 청년과 본래부터 추한 몰골을 가졌던 하녀의 사랑과 치유에 관한 이야기. 전쟁으로 신경쇠약에 걸린 청년이 자신을 동정할 수 없는(외롭고 쓸쓸한, 청년과 같은 처지에 있으므로) 하녀에게 결혼이라는 계약을 제안하고, 결혼식 날 어떤 신비한 불빛으로 인해 마법처럼 두 사람 다 아름다운 용모로 바뀌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서로의 마음을 보게 만들었고 진정한 사랑을 하게 만들었다. 부모님의 등장으로 그 모든 마법 같은 일들이 순식간에 깨지게 되고 본래의 모습대로 돌아간 두 사람은 기적 같았던 모든 일이 종말을 맞았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장님의 말로 그들은 사랑을 다시금 회복하게 된다.
"사랑은 바로 그런 거야. 사랑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사랑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지"
<네 번째 영화 이야기> 좌익 활동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던 아버지의 뜻과 맞물려 자동차 경주에 몰두했던 청년이, 아버지가 게릴라들에게 납치된 사실을 알고 아버지를 구출하는데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청년을 대신해 죽임을 당한다.
<다섯 번째 영화 이야기> 뉴욕에 살던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 카리브해 섬으로 출발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마법사가 '시체가 식기 전에 부활시킨 살아 있는 시체', 좀비를 만나게 되고 마법사를 비롯한 섬의 기묘하고도 악한 기운에서 남편을 구해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결국 악의 근원인 마법사는 번개에 맞아 죽게 되고 여자는 섬을 떠나게 된다.
<여섯 번째 영화 이야기> 멕시코시티에서 기자로 일하는 청년과 은퇴한 여배우이자 가수였던 여자의 사랑이야기이다. 여자가 마피아와 연관되어 있는 사업가의 보호(?) 아래 살고 있다는 스캔들 기사를 막은 청년은, 그녀에게 그 사업가의 집에서 탈출할 것을 제안한다. 여자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만 남자는 끊임없이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노력한다. 갖은 노력에도 여의치 않게 되자 남자는 술을 마시게 되고 병을 얻게 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여자는 집을 빠져나오고, 매춘한 돈으로 남자를 간호하게 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죽음을 맞는다.
어떻게 해도 발렌틴이 입을 열지 않는다.
교도소장은 몰리나를 불러 거래를 제안한다.
발렌틴으로부터 반독재 세력의 본거지와 다음 활동 타깃을 알아낸다면 어머니를 돌볼 수 있게 너를 가석방을 시켜주겠다.
몰리나는 거래에 응한다.
발렌틴과 같은 방을 쓰게 된 몰리나는 영화이야기로 물꼬를 튼다. 고문으로 짓이겨진 발렌틴을 물심양면으로 간호하고 끊임없는 호의를 베풂으로써 발렌틴의 마음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몰리나가 말해주는 모든 영화이야기는 몰리나와 발렌틴의 이야기를 함의하고 있다. 중의적이다.
대체적으로 여자는 몰리나를, 남자는 발렌틴을 대입하면 이해가 쉽다.
특히 두 번째 이야기, 교도소장의 스파이로 활동하던 몰리나가 정치적 견해가 다른 발렌틴을 사랑하게 되고 결국에는 석방된 후, 역으로 발렌틴의 부탁을 이행하는 모습은 영화의 모습과 판박이이다. 결국 극좌파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모습까지.
석방된 후 몰리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정부 측은 이렇게 말한다.
'피고가 사전에 은행계좌에서 예금을 인출한 것은 자신에게 어떤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보임. 또한 자신이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감시 요원들이 극좌파들과의 접촉 도중에 습격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획을 수행한 것은 (1) 극좌파들과 함께 도망을 가거나 (2) 극좌파들이 자신을 제거할 것을 각오했다는 두 가지 이유 중 한쪽이라고 생각됨.'
극좌파들이 자신을 제거할 것을 이미 알았던 몰리나는 자신이 발렌틴을 향해 쳐 놓은 수많은 거미줄에 자신이 걸려든 것임을 알고도 사랑을 위해 돌진하는 진정한 '사랑 지상주의자'의 면모를 보인다.
'내가 당신 마음속에 살아 있고, 그래서 항상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 그래서 당신은 절대로 홀로 있지 않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죠'
이렇듯 우리의 거미여인은, 혼수상태의 발렌틴에게, 기꺼이 사랑의 시를 바침으로서 끝내 그것을 완성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