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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선면 Aug 28. 2023

사랑한다면

이들처럼_자기 앞의 生

자기 앞의 生(문학동네)_출처 yes24/ 자기 앞의 생_출처 Daum 영화

이李씨(이하 이): 87학번인 언니가 고등학교 2학년인 나에게 소개해준 책이야. 읽으라고 사 준 것도, 빌려준 것도 아니고, 대학교 필독서라며 들고 왔길래. 대학생들은 무슨 책을 읽나 궁금해서 시작했다가 인생이... 꼬였다고 말하기에는 그렇고, 내 우울이 시작되었다고 해야 하나.


점선면(이하 점): 삼십 년도 더 된 이야기인데, 굳이 브런치스토리에 꺼내 놓는 것은?


: 이 책의 인상이 너무도 강렬했고, 책에 대한 애착이 큰 탓이겠지. 그 이후 20대에 읽었던 책들의 기억은 다 휘발되었어도, 1989년 내 인생에 훅 들어와서는 그 시절의 정서를 지배해 버린 책이라 기록을 남기고 싶었네.


이런 사랑도 있는가 싶었어.

이런 게 사랑이라는 건가 싶었어.

나의 정서적 지향점이 밝고 환한 맑음의 세계가 아니라

이렇게 어둡고 칙칙하고 습하고 매캐한 세계인가 싶었어.

묘하게 제대로이지 못한 사람들이 나를 매료시켰어.

천진한 듯 하지만, 사람의 폐부를 투시하는 모모가 맘에 들었어.

로자 아주머니의 싸고 거친 화장과 비대하고 둔탁한 몸이 추하게 생각되지 않았어.

기이한 인연으로 맺어진 그들이지만

사랑은 참으로 위대하다고 생각했지.


그런 세계를 알고 나니까,

국영수사과를 공부하고, 시험을 보고, 학교에 매여 시킨 대로 살고, 대학을 가는 현실세계가

갑자기 너무 세속적으로 보이는 거야.


: 세속적이라니? 소설 속의 이야기가 성스러운 것도 아니었던 거 같은데?

: 그럼 속물적이라고 단어를 바꿀까?

아무튼 한방 제대로 맞았는데, 그게 어딜 맞았는지도 모르겠고,

아픈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도 모르겠고,

뭔가 늘 팽팽하게 잡아당긴 장력 속에서 살다가 툭!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에 처음 며칠을 힘을 잃고 앓을 정도였어.


: 이거, 고등학교 때늦은 사춘기의 발동이 걸린 거구만요!


: 아마, 그랬는지도. 그때까지는 차안대를 찬 경주마처럼, 다른데 눈 둘 것 없이 공부나 생각하고 살았는데 갑자기 차안대가 떨어지고 뻥 뚫린 시선에 허둥대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하하.


괜히 대학교 필독도서를 읽었어. 나이에 안 맞게. 그때는 내가 조숙해서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 봐.


언니가 전해준 책이, 현세적 성공을 다룬 자기 계발서 같은 거였으면, 이후 나의 삶이 달라졌을까?흠.


모모는 나보다 몇 살 어린 친구로 설정되어 있어서, 그 캐릭터와 동질감을 느꼈나 봐.

사회의 규율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이면서, 로자 아줌마라고 하는 깊은 사랑의 유대감을 가진 존재를 소유했기에 모모에게 부러움과 시기를 느꼈던 거 같아.


그때는 미처 몰랐던 사실을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되었는데, 표지에 적힌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은 이 소설을 발표하기 위한 필명이었던 거고, 본명은 '로맹 가리'이며 사회적으로도 성공하고 명망 있는 상류층 고위 관리였다는 거. 심지어는 한 작가가 두 번 수상 할 수 없다는 콩쿠르 상을 이 소설로 두 번째 수상하게 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했다는 것.


좀 배신감을 느꼈지. 이런 하층민이라 할 만한 소외된 이들의 삶을 기막히게 그려내는 사람이 사회적인 성공까지 이룬 지적인 사람이라는 데 대해. 신이 재능을 너무 몰아주기 하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 에밀 아자르 덕분에 이 씨가 나의 이름을 따로 정해 주지 않았나?


: 그렇지. 언제가 글을 쓰면 꼭 필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그때 심어진 거긴 하지.


: 영화는 봤어?


: 아니. 일단 로자 아줌마 역의 배우가 소피아 로렌이야. 이것부터가 말이 안 돼. 그리고 검색해 본 결과 영화의 설정이 모모가 열세살인가, 얼만가 나이가 들고 나서 로자 아줌마를 만난다는 거야. 그래서, 영화는 걸렀지. 보다가 실망정도가 아니라 화가 날 것 같아서.


: 훗. 진정해.

그리고 혹시 궁금해하는 분들을 위해서 짧은 줄거리소개 좀 부탁해.


: 프랑스 소설이고요, 배경은 1970년대 파리의 빈민가. 퇴역 매춘부 로자아줌마는 돈을 받고 후배 매춘부들의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어. 모모도 그중에 하나인데, 비록 친엄마의 송금이 끊어졌어도 로자 아줌마는 모모를 데리고 살아. 소설이 진행되면서 로자 아줌마는 치매가 진행되고, 교도소에 있던 모모의 아빠는 아들을 찾겠다며 이 집에 찾아오면서 극적 갈등을 만들지. 그리고... 아름답고 슬픈 이별의 이야기가 이어져. 어머니의 입관일에 장의사들이 어머니를 화장시켜주는 모습을 보며, 모모를 생각했지. 여기까지 말할게.


아, 너무 아쉬울까 봐. 명대사 하나 소개할게.

모모가 물어.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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