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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선면 Apr 10. 2023

새 생명

이 땅의 삶을 시작한 아가, 환영한다

2022.4.2.(토)

새벽 5시 30분 시댁으로 출발. 4시간 30분의 운전. 아침은 준비해 둔 샌드위치와 과일로 차 안에서 해결. 10시 도착. 이 정도면 양호했다. 나의 시댁은 여수다.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남편이 담담히 부모님을 뵈러 가자고 했고, 나도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다. 시월드에 대한 성토가 드물지 않은 우리나라 문화에서, 나는 시댁에 가는 게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축복을 누려왔다. 아, 그 편안함은 세월이 준 선물일 수도 있다. 잠시 새댁 시절을 잊었다. 하지만, 그때의 낯섦과 부담도 그냥 내가 느꼈던 어색함이었던 것이고, 시부모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시어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어머니 상(像)인 '소설 페스트의 주인공 베르나르 리외의 어머니'같은 초월적인 면모가 있다. 깊은 신앙심에 뿌리를 둔 말없는 헌신, 그리고 자녀들이 성장한 뒤  각자의 가정으로 건강한 독립을 이루게 한 지혜로움이 느껴지는 분이다.


결혼 20주년이던 날 작년,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저희 오늘 결혼하지 20주년이 되었어요.'

'아이고, 벌써 그렇게 되었어?'

'저희, 이제까지 어머니 기도 덕분에 잘 살았어요.. 감사합니다..'

말 끝에 내가 먼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부족한 것들이 왜 안 보였겠나 마는, 한 번도 싫은 내색, 원치 않는 충고, 조언, 평가나 비난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셨다.

'어.. 그래, 나도 감사하다. 다 하나님 은혜다. 앞으로도 잘 살아.'

전화를 끊고 엉엉 울어대는 소리에 놀란 남편이 안방으로 들어왔다.

'결혼기념일이라 어머니랑 통화하는데 너무 감사해서...'

'아이그...' 어깨를 토닥토닥...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냥 남편은 내 곁에 있어줬다.



시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는 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병상에 누운 어머니 생각이 나서였을 거다. 시부모님도 이제 80대 후반이라 내가 시집오던 때보다 많이 나이 들고 약해지신 모습이지만, 큰 병 없이 건강하게 지내신 편이었다. 그래도 시부모님을 대면하니, 나이 듦과 병듦에 대한 최근의 체험들이 그만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나를 맞아주시는 담담함(이것이 이 집안의 내력인 듯하다)과 위로의 몇 마디에 담긴 그분들의 마음이 전해지기에 감사하고, 서글펐다.


시댁 안방에는 아들 형제에서 난 친손자손녀들의 어릴 적 사진들이 걸려있다. 사진 속 아기들은 올해 나이 스물다섯, 스물둘, 스물 하나, 열일곱, 열다섯, 열셋이 된다. 엎드리거나, 기거나, 아니면 겨우 목을 세워 품에 안긴 아기들이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세월은 부모님의 육신에서 젊음의 기운들을 앗아가고, 대신 노쇠의 흔적을 남겼다. 거스를 수도 없는 일이고 피할 수도 없는 일이라, 나 역시도 흰머리가 하나둘 늘어가고 있다.



점심을 먹고 마당에 나가 햇볕을 쬐고 있었다. 휴대폰 알림 메시지에 내용을 확인해 보니, 삼 남매 카톡방에 사진이 몇 장이 올라와있다. 갓 태어난 신생아 사진, 아기를 바라다보는 조카부부의 사진, 아기를 안고 있는 조카의 사진. 그리고 메시지, '나 할아버지 됐다.'

친정 쪽으로 유일하게 한 명 있는 조카가 출산을 했다.


조카는 따뜻하고 다정한 소녀다운 어리광으로  가끔 만나는 할머니에게도 살갑고 다정했었다. 우리 어머니도 여느 할머니들처럼 애정표현이 풍부하진 않았어도, 아들의 혈육이라 마음만은 각별했던 손녀였다.


지금 집중치료실에 계신 어머니는 언제, 손녀의 출산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When~을 묻는 질문, 혹은 Is it possible ~가능한지를 묻는 두 가지 의문이 한 문장 안에 다 들어있다)


어머니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이 시간 중에 새로운 생명이 우리 가족에게 온 것이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인생사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이렇게 한 세대가 오고, 한 세대가 가고, 그러면 다음 세대가 이어지고, 가고 오는 일이 반복되어 한 가족이, 국가가, 인류가 이어져온 것이겠다.


지금 어머니가 가는 그 길이 얼마 후 나의 모습이고 내가 갈 길다.

이제까지 성경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을 제외하고 육신의 죽음을 피해 간 인간은 없다.


어떤 이는 부와 권력으로 노화와 죽음을 피하고 영생불사, 젊음을 얻으려고도 했었다. 그리고, 앞으로 기술이 발전하면 그것이 그 길이 더 넓어질지 모른다. 노화를 질병이라 규정하고, 노화를 멈추게 하려는 연구기관이 막대한 자금을 끌어모아 연구 중이라는 기사도 봤다. 만화 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기계인간이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인공관절, 인공 수정체, 인공...


죽음을 피하려는 이유는 뭘까?


육신의 죽음에 이르는 길은 형벌처럼 힘들고 고통스럽게 보인다.  그게 순간이든, 길고 긴 여정이 되었든. 하지만 죽음이라는 바로 순간은? 형벌일까, 축복일까? 그 문을 통과하고 난 다음에 어떤 시간이, 공간이, 아니면 시공간을 초월한 어떤 무엇인 기다리고 있는가?


'생명체의 죽음'이라는 현상은 객관적이다. 숨이 멎으므로써 생명활동을 멈추는 상태이므로. 하지만, 죽음 이후는 어떤가? 살아서 죽음을 경험하고 그 이후의 세계를 입증해 보일 이가 없기 때문에, 죽음 이후에 대한 개념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바로, 자신이 생각하는 바, 믿음의 영역이다.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생명은 원래, 그냥 우연히 주어진 게 아니다. 필연적인 신의 뜻에 의해서 이 땅에 나름대로의 사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문에는 심심치 않게 '살아 드린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나의 생을 내 뜻대로가 아니라, 나에게 생명을 허락한 전능자의 뜻에 맞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의 말이다. 이 땅에서의 생은 시작이 있으니, 끝도 존재하는 것이지만, 지금 살아가는 지구상의 물질적인 차원을 벗어나면 영속적인 시간 속에서 다른 존재로 화(化)하여 신을 대면할 것이라는 소망을 갖는다.



기독교 불모지라 불리는 제주도에서 어머니는 노년에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주변의 평가 시선보다는 자신만의 영적, 정신적 세계를 소중히 하는 어머니의 주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친척 고모님을 따라 몇 해 안은 한 시간씩 버스를 타고 가서 시내 교회에 출석했고, 그 후에는 읍내 교회에 등록교인이 되어 주일예배를 드렸다. 젊은 시절 불교에 깊이 심취했던 그 종교성으로 성경말씀에 깊이 마음을 쏟았다.


어머니에게 새로운 생명 탄생이 기쁨의 소식으로 임할 것처럼, 고통 중에도 천국의 소망이 임하기를... 

그리고, 조카 태중에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육신을 지음 받고, 오늘 드디어 세상을 향해 힘껏 몸을 뻗어 나온 새 생명, 아가에게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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