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어버이날
5월 3일 제주도로 왔다.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 2주간 혼자 어머니를 돌본 오빠에게 휴식의 시간을 주는 것.
둘, 5월 6일 제주대학교병원 외래진료 때 오빠와 동행해 주는 것.
제주도로 들어오던 5월 3일,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 창밖으로 한라산에서 바다까지 뻗어 내린 제주 풍경에 마음이 동(動)해, 작은 일탈을 마음먹었다.
오늘은 어디 좀 쏘다니다 가야겠다.
아예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몇 가지 간병물품을 시내에서 사 오라는 전화연락을 받아서 약국에 들렀다. 그리고 시내를 이리저리로 걸었다. 그러다가 발길이 딱 멈췄다.
카네이션!
시골집으로 가는 내 가방 안에 작은 조화 카네이션 한송이를 담았다.
그 카네이션을 오늘 어머니 가슴에 달아 드렸다.
'어머니, 오늘 어버이 날이라. 나아 주고 키와줭 고맙쑤다.'
지난 며칠 어느 때보다 어머니의 표정은 평화로웠고, 눈빛도 살아있는 날이었다. 선물처럼 찾아온 시간이었다.
좋은 타이밍이라 놓치기 아까워, 언니에게 영상통화를 시도했다.
어머니는 화면 속에 보이는 큰 딸을 유심히 봤고, 작게 언니의 말에 고갯짓을 하는 듯이 보였다.
남편에게도 전화를 하고, 남편과 딸이 어머니와 통화하도록 했다.
시댁으로도 전화를 드렸다. 어버이날이니까 이번에는 조금 일찍, 주일 예배드리러 나가시기 전에.
얼마간의 전화통화가 끝나고, 어머니와 둘이 있는 시간.
윌리엄 폴 영 작가의 소설, '오두막(The Shack)'을 무척 좋아한다.
하늘 아버지(Heavenly Father)의 마음과 인간세상의 아버지의 마음이 아름답게 담겨있는 소설이다.
처음 소설을 읽을 때에 나는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고, 신앙생활도 이십여 년이 된 시점이었다.
인상적인 장면들 중에도 내게 가장 긴 여운을 남긴 장면은 주인공 매켄지가 어느 아이를 지옥에 보낼 것인지 선택하라는 요청을 받는 부분이다. 인간으로서 심판자의 자리에 서려하는 교만함에 대한 지적에 주인공은 정신이 무너져내리는 중이다.
아버지로서 그럴 수 없다고 응대한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거듭되는 요청에 주인공은 끝내 소리친다.
"대신 내가 가면 안 될까요? 영원히 고문받을 사람이 필요하다면 내가 대신 가겠어요. 그래도 될까요? 내가 그렇게 해도 될까요?"
....
"내 아이들 대신 내가 가게 해줘요. 제발, 기꺼이 그렇게 할게요. "
주인공의 이 간절한 고백은, 곧 예수님의 간구이기도 했다. 죄인인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죄의 형벌을 대신 지겠다는 애끓는 사랑. 그 사랑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부모가 되어서야 알게 된 것이 있다. 나를 통해 이 세상에 온 아이들을 만났을 때 하늘만큼의 기쁨과 함께 우주만큼의 책임감도 왔다. 조그만 생명체에게 내가 곧 세상이었다.
나이 50이 되어서야 알게 된 것이 있다. 자식들이 생각하는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의 크기는, 진짜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의 크기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
내가 이렇게 쓰기는 했지만, 나 자신도 청소년기에는 위에 적은 일반화된 부모의 모습과는 다른 어머니로부터 심리적인 결핍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것 역시 내가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에 올라갔기 때문에 생긴 고통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거대한 사랑이 오자, 사랑의 갈증이 채워졌다.
비로소 어머니에게 내게 원하는 만큼을 주지 않았다고, 주지 않는다고 아쉬워하는 마음을 그치게 되었다.
그제야 나에게 어머니와 화해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