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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선면 Apr 28. 2023

어머니의 전원(轉院)

요양병원으로

2022. 6.22.()

6월 7일 화요일에 어머니가 집중치료실에 나오자 다시 오빠는 일반병실 간호를 시작했다. 오빠는 어머니의 초췌하고 병세가 심한 모습에 속상함이 컸고, 병원 환경도 맘에 들지 않아 불만이 많았다. 3월 입원해서 지내봤던 제주대병원에 자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간 병원이라 낯설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어머니가 실성한 것처럼 내지르는 소리에 다른 간병인과 환자들이 불평을 하자, 오빠는 더 이상 일반병원에서 어머니를 간병하는 걸 버틸 수가 없었다. 이튿날 6월 8일 어머니를 알아봐 뒀던 요양병원으로 모셔갔다.


오빠는 어머니가 건강하실 적에 요양병원에 안 가고 싶다고 하셨다는데, 어머니의 바람과 다르게 일은 흘러간 거다.


어머니가 병원 생활을 시작하시고 난 뒤, '노년', '존엄한 죽음'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죽음을 준비하는 주제의 글과 영상을 흡입하듯 찾아보고 읽었다.


어느 의사분의 말처럼, 이렇게 길게 사는 세대를 경험해 보지 않은 우리는 이 길어진 투병의 기간과 죽음을 맞는 방식에 대해서 준비되지 않은 것 같다.


자본이 잠식한 생명연장이 아니라, 한 인격체로 죽음 전에 존엄하고, 존중받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요양병원 전부가 환자들 재원화하는 것이 아니란 것도 인정해야지. 가족들이 노령환자가족을 돌보기에는 어려움이 너무 많고, 어느 정도 이런 서비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점도 있지 않은가.



'만약, 내 자식들이 나 때문에 너무 힘들 거 같으면, 나도 병원으로 가는 걸 선택할 거 같아.'


6월 초 어머니를 보고 왔을 때, 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나를 돌보는 자식들, 가족들이 고맙기도 하지만, 자기들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맘이 더 클 것도 같다.


이건 나의 갑작스러운 태세전환인가? 처음 어머니를 퇴원시킬 때, 우리가 바로 요양병원으로 모시지 않았던 것은 어머니의 의식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만나고 너무 자주 우셔서, 병원에서는 우울증 약을 처방했다. 그런 어머니를 완전 타인들의 손에만 맡길 수는 없다는 게 자식들 맘이었다. 그러나 지금, 의료장비 없이 어머니의 생명을 부지할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실지 몰라도 자식들은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는 자기 위로를 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 때문에 요양병원의 면회도 무척 제한적이었다. 그래도 오빠는 어머니를 못 보더라도, 자주 들러서 어머니 상태를 물어보고 단체 대화방에 메시지를 올렸다.


19일에 오빠가 면회를 다녀왔고, 다음 면회까지는 3주간의 기간을 둬야 한다는 조항에도 언니는 사정해서, 21일에 면회를 다녀왔다.


잠시 어머니를 만난 언니, 오빠는 어머니의 상태가 이냥 저냥이라고 했고, 번은  청색증이 왔다는 연락을 오빠가 전해줬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면회신청을 하려고 요양병원으로 전화했다. 그쪽에선 7월 13일을 말했다.  직장생활 때문에 사정을 봐달라며 거짓말을 했다. 술술 잘 나오는 거짓말에  속으로 놀랬다. 이런 때를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속임수의 페르소나 발견! 결국 7월 8일로 예약했다.


나의 순전한 정직,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기원하며 잎새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해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못된 거짓말은 하기도 싫고 듣기도 싫다. 누구나가 비슷하겠지만.


 일찌감치 애당초 인간에게 순수한 결백, 무죄, 무오성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나의 수치와 거짓을 너무 성급히 확대 일반화한 것인가? 직관사고형인 나에게는 그런 결론이  꽤나 빨랐다.


오늘  면회예약 전화통화를 마치고,  짧은 한숨이 훅 나왔다. '이런. 거짓말!'  

그러면서도 나의 거짓말이 무해한 것이기에 하나님도 눈감아 주시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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