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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선면 May 01. 2023

유자나무의 노래

2013년, 오계아 님의 네 번째 책

(서두의 축하글)

어머니 뭐 햄쑤강?


장면 1

부엌이 개량되기 전, 좁은 부뚜막에 솔단지가 서너 개 올려져 있고 어머니는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때고 계셨죠. 그런데 불을 때는 것보다는 다른데 정신이 팔려있으시네요. 나지막하고 기다란 나무틀을 책상 삼아 오늘도 열심히 무엇인가를 쓰고 계세요.


아궁이 밖으로 불꽃이 넘실대면 익숙한 동작으로 땔감을 솜씨 좋게 접어 넣고 다시 또 시선은 종이 위로. 어린 눈에도 어머니의 글쓰기에 대한 몰입이 신기할 지경이었습니다.


꼬맹이 막내딸을 앞에 앉히고 내가 쓴 시를 들어봐라, 어떠하냐 하면서 의견을 묻는 듯 하지만, 정작 어머니는 벌써 글로 적힌 것 너머의 생각을 하며 혼잣말을 하시네요. 그게 뭐 정말 그리 대단하고 재미있는 거라고요?




장면 2

새벽녘에 또 설핏 잠이 깨었습니다. 옆에 어머니가 없어요. 잠들 때 말랑말랑 뱃살을 만지면서 잠들었는데, 밤중에 잠깐 잠이 깨어 그 체온과 촉감을 느끼고 싶은데, 어머니는 저기에 홀로 계셔요. 미닫이 반창문 무늬유리 너머로 형광등 불빛이 어지러이 흩어져 보입니다 어머니는 오늘 새벽도 저기 마루에 앉아서 무언가를 읽나 봅니다. 아니면 뭘 쓰나 봅니다. 잠도 안 자고 그게 경 재미 지우까? 저는 말하고 싶어도 꾹 참고 그냥 있었습니다.




장면 3

15년 전 쯤되겠네요. 어머니의 자서전이라는 노트를 받았네요. 한 번 봐달라는 말에 정말 한 번 봤습니다. 대학 다닐 때라 제 주변의 일에 몰두하고 있어서 어머니의 요청의 간절함이 와닿지 않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서 어떻게 더 좋게 할지 난감하기도 합니다. 어떤 글쓰기 교육도 받지 않은 야생의 글 자체. 이건 저의 능력밖의 일이기도 하고요. 아니 이걸 써서 누구한테 읽히려는 겁니까?




장면 4

휴가를 맞아 집에 들렀더니 어머니 아버지가 참 화기애애하십니다. 어렸을 적 기억엔 두 분이서 참 많이도 싸우시더니, 자식들 다 커서 제 밥벌이하니 여유가 생기셨나 봅니다. 아버지께서 어머니의 글쓰기를 칭찬하시고 저에게 자랑하시다니요? 제가 어렸을 때 역할 중 하나가 아버지 망보기였는데요.


아버지가 나타나면 어머니에게 경고를 울립니다. 그러면 재빠른 동작으로 어머니는 볼펜이며 종잇장들을 휩쓸어 담아 숨겨놓고 아닌 척 하기. 그때가 생각나서 픽 웃음도 났지만 그 옛날 두 분이서 싸우는 모습보다 훨씬 보기 좋았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서예를 칭찬하시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글쓰기를 자랑하시는 모습. 그 흐뭇함, 자부심, 격려. 아름답네요.




장면 5

흠흠. 어머니의 자서전 출판에 부쳐 근엄하고 점잖은 인사말을 해야겠으나, 그 몫은 언니가 한 것 같고, 어머니의 글재주를 전승하는 가풍을 보여줘야겠으나 그 몫은 오빠가 한 것 같아서 막내딸은 솔직한 까칠함대로 정직하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어머니! 살아오면서 다 듣지 못한 어머니의 인생의 기록을 이제 활자로 읽으면서야 어머니를 좀 더 알았습니다. 한 여자의 인생으로서 아프고, 실망하고, 낙담하기도 하고 안도하기도 한, 기대와 보람, 행복에 공감하면서요. 알게 되면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던가요? 00이와 00이가 할머니의 자서전을 읽으며 한 번도 눈으로 뵙지 못한 외할아버지를 그려보고, 또 멀리 있어 만날 때마다 서먹한 외할머니를 많이 알고 사랑하게 될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태생이 시인이셨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그리고 천운처럼 글쓰기를 배우고 그 연습과 훈련 끝에 세상에 나온 자서전, 자랑스럽고 축하합니다. 오계아 여사님 만세!   


-둘째 딸-



첫 번째 책 '명월리 팽나무처럼'이 조각난 글들의 모음집이라면 이번책은 연대기적 구성에다가 자료사진까지 들어가 한결 정리되고. 글의 내용도 풍부해졌다.


아버지에 대한 언급도 변화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 빛깔은 고와진 느낌.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시기 전까지 3년여 동안, 두 분은 서로의 취미생활을 존중하고 자랑스러워하셨다. 앞에 사십여 년 동안의 서운함과 서러움이 마지막 3년에 녹아내린 것이다. 진실로 어머니는 아버지가 보여준 마지막 삼 년 동안의 모습에 감사했고, 그리하여 간병의 시간도 담담히 지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뒷마당의 유자나무가 말라죽어 결국 깊던 뿌리까지 뽑혀 자리를 떠났다. 그 유자나무를 기려, 어머니는 온라인 동호회 닉네임을 유자나무로 정했다. 이 책의 머리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https://brunch.co.kr/@a49220c896344b2/57


초등학생이 된 두 손자손녀에게 할머니의 친필인사가 남겨진 책이 전해졌다.

내가 어렸을 때 봤던 글씨체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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