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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나들이 Mar 26. 2024

행복은 이야기를 만드는 나의 몫

등과 빨대

발령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겨울방학을 이용해 뉴질랜드로 5주간 어학연수를 떠났다. 숙소는 친구 M의 외삼촌이 운영하는 크라이스트처치의 홈스테이였고 M의 어머니가 외삼촌을 업어 키운 덕에 우리는 아주 저렴한 값에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크라이스트처치 성당 앞에서

M의 외삼촌과 외숙모는 넉넉한 품에 푸근한 인상을 가진 분들이셨다. 한국에서 뜬금없이 어학연수를 하겠다고 날아온 조카와 생면부지의 조카 친구에게 저녁마다 삼겹살, 불고기 같은 한국음식을 푸짐하게 차려주셨다. 주말이면 외삼촌은 우리를 데리고 근교로 여행을 다니셨다.

연어 농장

퀸즈타운에 있는 카와라우 브릿지에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번지점프도 뛰고 연어농장에서 싱싱한 연어회도 먹으며 무계획으로 간 여학연수에서 뜻밖의 멋진 여행을 하게 되었다.

카와라우 브릿지앞에서
멋진 폼으로 뛰어 내리고 싶었으나...

외삼촌과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외삼촌의 살아온 인생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많았다. 사회초년생인 우리는 외삼촌의 인생이야기가 드라마인양 흥미롭게 눈과 귀를 열었다.


외삼촌은 한국에서 가구 공장을 운영했는데 갑자기 불어닥친 IMF 한파로 그야말로 쫄딱 망했다. 거기다 친구 M의 엄마가 외삼촌에게 보증을 서준 바람에 M의 집까지 역풍이 몰려왔다. 그 당시 M의 아버지는 은행을 다니시다 IMF로 명예퇴직을 하셨고 가족 중 소득이 있는 사람은 M이 유일했다. 결국 M의 월급 중 절반은 외삼촌의 빚을 갚는데 고스란히 들어갔다.


몇 년 후 M의 외삼촌은 뉴질랜드행을 선택했고 우여곡절 끝에 크라이스트처치에 홈스테이를 열게 되었다. 목숨 같은 돈을 가지고 이곳에 왔을 때 삼촌이 정착할 때까지 도와주겠다고 나선 이가 있었다. 삼촌가족이 살만한 적당한 동네를 알아봐 주고 목공일을 하던 삼촌에게 일감을 가져다주었다.


영어도 서툴고 모든 것이 낯설어 기댈 곳이 필요한 삼촌에게  동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삼촌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돈을 맡겼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 그는 삼촌의 마지막 보루 같은 돈을 가지고 사라졌다.


가지고 온 돈마저 모두 날리고 현재 홈스테이로 자리 잡기까지 삼촌가족들이 어떻게 견뎠는지 자세히 말하진 않았지만  이민 온 사람 등에 빨대 꽂은 인간에게 느껴지는 분노만큼 삼촌의 얼굴에 고된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외숙모가 웃으며 교회 다니는 사람을 그토록 싫어하던 삼촌이 이제 주말마다 교회를 나가 열심히 기도를 하신다고 했다. 삼촌은 작은 목공소를 운영하며 교회에서 가구 주문을 받아 제작하고 외숙모는 홈스테이 식구들을 챙기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아들이 핫도그 알바를 그만두고 일한 곳은 SPA 패션 브랜드 매장이었다. 기름 앞에서 일하는 아들이 안쓰러워 내가 적극적으로 추천한 곳이다. 첫날 일을 마치고 온 아들은 매장 분위기가 어수선하다고 했다.


점장님은 늘 매장을 비우고 아르바이트생들은 일 안 하는 점장님에 대한 불만을 쏟아놓는다며. 아들은 일한 지 이 주 정도 지나자 매장에 출근해도 매장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사무실에 앉아서 나오지 않는 점장님을 보며 직원들의 불만이 이해된다고 했다.


매장에는 30대의 매니저와 20대의 아르바이트 직원 5명이 교대로 근무를 하는데 매니저가 유독 직원 K에게 만 계속 화를 낸다고 했다. 의류 매장일이 처음인 자기가 보기에도 K는 일하는 속도가 느리고 실수가 잦은 편이긴 하지 매니저는 사사건건 K를 몰아붙이며 핀잔을 준다고 했다.


그러다 아들이 매니저와 단둘이 포장업무를 하게 됐을 때 매니저는 K가 얼마나 일머리가 없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K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아들은 듣고 있는 내내 윗사람이 제일 막내인 자신에게 선배 K에 대해 험담을 하는 게 불편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 다. 자신이 무반응으로 일관하자 머쓱해진 매니저는 자리를 피했고 그 이후로는 자신에게 K의 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들은 K를 갈구매니저처럼 다른 직원들도 K를 싫어하고 말을 걸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들은 아랑곳하지않고 K와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대했다고 한다. 아들은 이 작은 매장에서 일어나는 일그러진 행위들이 부당하다고 느꼈고 자신은 그 무언의 영혼 파괴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한 사람을 배제시키는 권위에 맞서 내 주관을 지킨다는 건 일종의 모험이자 용기이다. 나도 언젠가 같은 처지가 될지 모른다는 위험부담을 안고 가야 할 일이니 말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직원에게 미루는 보스 밑에서 일어나는 불만과 관계의 충돌, 왕따는 어쩌면 정해진 수순일지도 모른다. 보스가 해야 할 일이 비단 업무와 관련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격려, 배려, 응원 중 하나라도 보여주었다면 여섯 명의 작은 집단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좀 더 아름답지 않았을까


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전 핫도그 가게 사장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깨닫게 된다고 했다. 의류 매장은 점심도 사비로 먹어야 하는데 마음씨 좋은 핫도그 사장님은 점심, 저녁 끼니마다 맛있는 거 사 먹으라며 카드를 주셨다. 그뿐인가. 아르바이트생을 아들처럼 아껴주칭찬해 고 기념일에는 선물까지 챙겨주셨으니 그 너른 품이 태평양급이다.

"사장님이 노란 커피 좋아하시니까 큰 거 한통 사들고 가려고요."

아들이 핫도그 가게에서 일할 때에도 전에 일하던 아르바이트생들이 계속 찾아온다고 했다. 때마다 사장님에게 와서 근황도 전하고 아들처럼 이야기를 하다 간다고. 사장님이 직원들에게 베푼 정이 돌아오는 건 당연하겠지만 요즘처럼 귀찮은 거 싫어하고 자기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20대 초반의 남자아이들의 마음과 발걸음을 움직이는 사장님의 따스함은 경이롭다.


살다 보면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남의 등 쳐 먹는 사람, 남에 등에 빨대 꽂는 사람, 남을 왕따 시켜서 눈물 나게 하는 사람 그리고 다시 만나고 싶은 좋은 사람.

살면서 만나는 사람은 나의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나의 몫이다.


행복이란 이 세상 살아가다

계산없이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진솔한 사람,

이유없이 좋은 사람을 만나

무용담 하나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중간에 악역을 만나도 엑스트라로 만들어 버리는 구성능력을 키우면서.


아들은  달 후 의류 매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알바를 구했다. 여름방학때 단기알바를 하던 곳인데 정해진 시간보다 20분 먼저 출근한다. 사장님이 너무 좋으시다면서.



한 줄 요약 : 살면서 만나는 사람은 선택이 아니지만 그 속에서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나의 몫이다.


# 라라크루 #라이트라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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