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코감기에 걸려 일주일 넘게 고생 중이다. 딸은 나의 축농증 유전자와 남편의 비염 유전자를 골고루 물려받았다. 아주 어렸을 때는 코감기에 중이염도 같이 와서 항생제를 많이 먹였다. 항생제의 부작용을 알고 난 이후로는 코감기 증세를 보이면 바로 생강차를 끓여준다. 천기누설표 생강차를 끓여 먹이면 대부분 3일 내에 좋아졌는데 이번 감기는 독해도 너무 독하다. 오늘도 학교 갈 때 500ml 텀블러에 따뜻한 생강차를 넣어주었다. 그나마 내가 만든 생강차와 영양식 덕분에 감기가 악화되지는 않는 것 같아 다행이다. 교사에게 3월은 전쟁 같은 달이라 휴직한 덕분에 아픈 딸을 챙겨줄 수 있어 감사하다.
"나 오늘 엄마랑 같이 자면 안 돼요?"
몸이 아프니 엄마품이 그리운지 다 큰 딸이 엄마와 자고 싶다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하룻밤 안고 잤더니 다음 날 아침, 나까지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이왕 딸아이 감기가 나에게로 왔으니 딸아이는 씻은 듯이 나았으면 좋으련만.
코가 막히니 하루 종일 머리가 띵하고 몸이 찌뿌둥하다. 아프고 나니 건강하게 생활하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게 된다.
양가 부모님 중 시아버님이 제일 병약하셨는데 10년 전 신부전증으로 투병하다 돌아가셨다. 남편 말에 따르면 아버님은 예전부터 말씀이 없으셨다고 한다. 그저 하루 종일 아버님께 들을 수 있는 말은 짧은 대답과 "어, 왔나."가 다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의 표본 같은 분이셨다. 그런 아버님이 내가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하시고 용돈까지 주셨다.
철없는 막내로 자라 집안의 맏며느리 노릇을 잘 못하고 있을 때에도 듬직하고 믿음직스럽다고 말씀해 주셨다. 건강이 악화되어 병상에 누워계실 때도 내가 가면 제일 좋아하셨다. 어머니가 "당신은 딸보다 큰 며느리를 더 반가워하네." 하며 말씀하실 정도였다. 연배가 비슷하신 친정아버님이 아직 정정하게 살아계신 걸 보면 아버님이 조금만 건강하셨어도 손주들 크는 모습을 보며 더 행복하셨을 텐데 안타깝다.
어머니는 병약한 아버님을 살뜰히 챙기셨다. 무뚝뚝한 아버님이시지만 말없이 어머니를 아끼셨고 두 분이 큰 소리를 내고 싸우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항상 어머님이 이야기를 하고 계시면 아버님은 조용히 들어주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는 시꺼먼 천장을 바라보며 밤새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는 아버님 투석 시중을 드느라 팔과 다리 관절이 다 망가졌는데도 아버님이 그렇게 보고 싶다고 하셨다. 아버님이 집에 누워만 계셔도 집에 돌아와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너무 다르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아버님이 돌아가신 이후로는 남편이 어머니께 매일 전화를 드린다. 어머니는 우리 부부에게 늘 " 부부가 최고다. 싸우지 말고, 돈 아끼지 말고 재밌게 살아라."라고 하신다.
우리 아들이 4학년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고 지금 아들은 스물한 살이 되었다. 건강관리를 잘하셔서 지금까지 살아계셨다면 손자를 보고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아버님은 장손인 우리 아들을 특별히 예뻐하셨다. 손녀들 몰래 데리고 나가 레고도 사주시고 용돈도 더 많이 주셨다. 아버님식의 애정 표현이었다.
아프고 보니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 가족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행복한 것을.
일요일 밤에 기숙사로 들어가는 아들이 잠바도 입지 않고 얇은 봄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데 혼자 있으면서 감기나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메시지를 보냈다.
"아침, 저녁으로 추우니까 따습게 입고 다녀. 사랑해."
"고마워요. 나도 사랑해요."
아들이 사랑한다고 대답해 주니 또 마음이 따뜻해진다.
"린아~ 생강차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 우리 이쁘니 사랑해~ 파이팅."
"나도 사랑해요."
아들, 딸과 사랑의 대화를 주고받으니 감기가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다음에 또 화나거나 속상한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지금 이 순간 저장했던 감사를 꺼내 써야겠다. 오늘 행복도 저장!
한 줄 요약 : 일상의 행복을 저장해서 나중에 꺼내 써보자.
천기누설(TV 프로그램) 표 생강차
파 5 뿌리, 양파 3개(껍질 째), 생강 2 주먹, 물 2리터를 넣고 센 불에 끓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