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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Aug 26. 2022

손님 말을 맹신하지 말라

돈 앞에서 거짓말하는 손님들

나는 호스텔을 떠도는 배낭여행객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같이 없는 처지에 경계를 해봐야 무얼 하겠냐는 게 기본이었다. 열명도 훌쩍 넘는 사람들이 한 방에 묵는 도미토리에서도 사물함을 자물쇠로 걸어 잠근 적이 없을 정도다. 가끔 호스텔 투숙객 중 ‘누군가가 내걸 훔쳐간 게 분명하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엔 그들이 화장실 주변이나 공용공간 등 뜬금없는 장소에서 잃어버렸던 물건을 발견하는 걸 나는 그간 많이 봐왔다. 분실물 발생의 이유는 대부분 본인의 부주의였을 뿐 다른 손님이 훔쳐간 정황은 없었다. 배낭 여행객이다 보니 부피를 차지하는 물리적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일 뿐이었을까. 호스텔에서 일을 시작하며 난 투숙 비용 앞에서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손님에 질려버렸다. 이제는 배낭여행객에 대한 기존의 믿음조차 흔들릴 정도다.





트레이닝 기간을 끝내고 혼자 근무를 서게 된 지 얼마 되지 않던 때였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짧은 영어에도 말을 잘 붙이는 기분 좋은 이스라엘 청년이 있었다. (앞선 포스팅에서 말했듯이 이번 호스텔의 손님의 대부분이 이스라엘 사람이다) 안면 인식 장애가 의심될 정도로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도, 스텝은 물론 여러 손님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그 청년의 얼굴은 다른 사람과 헷갈리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동네 마실 나갔다가 길에서 그를 알아볼 정도였다. 우연히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길거리 그 누구보다 반갑게 인사했다.



같은 날 나는 호스텔 리셉션에서 그를 또 만나게 됐다. 숙박 연장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현지인들도 몰려오는 주말이어서 값싼 도미토리는 일찌감치 모두 예약이 다 차 남은 침대가 없었다. 대신 방 안에 욕실이 딸려 있어 숙박비가 일반 도미토리보다 비싼 고급 도미토리는 여유가 있었다. 그래 봤자 이 둘의  가격 차이는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5,000원가량이었다. 그래도 그 청년은 내야 할 돈이 기존에 머물던 방보다 많다는 이유로 당황한 듯했다. 한 푼도 아쉬운 배낭여행객으로서 그의 입장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 이 숙소에 오래 있었는데 방값 깎아주면 안 돼?”



믿기 어렵겠지만 난 예전부터 아무 이유 없이 방값을 할인해 달라는 요구를 많이 받아왔다. 이번에도 그런 일이겠거니 했다. 보통 내 선에서 ‘안 된다’라고 말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매니저한테 한 번만 물어봐 달라고 졸라대는 것이었다. 그도 역시나 그랬다. 나는 안 될걸 뻔히 알면서도 안면을 익힌 손님과의 약속이기도 하니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의 인상착의 설명과 덧붙여 ‘그가 여기 오래 머물렀다며 할인을 부탁한다’고 그대로 전했다. 워낙 붙임성이 좋던 청년이었다 보니 매니저도 그를 기억하는 것 같았다. 매니저의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본인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풀었다. 친구와 며칠 전에 이 숙소에 처음 왔는데 지금은 그 친구가 먼저 떠나고 자기 혼자 남아 있다고까지 구구절절 내게 설명해줬다. 예전에는 그 친구의 이름으로 예약을 했다고 했다. 난 시스템상으로 그가 정확히 며칠을 머물렀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의외로 매니저는 흔쾌히 할인을 허락했다. 사실 엄청나게 인심을 쓰지 않았다. 할인 금액은 3,000원 조금 안 되는 가격이었다. 어찌 됐든 그 청년은 의도치 않게 돈을 더 많이 내고 잘 뻔하다가 가격을 깎아서인지 할인 가격에 상관없이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손님이 그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딱히 내가 한 건 없긴 해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때, 리셉션 근처 테이블에 앉아 영어 공부를 하고 있던 아르헨티나 동료가 말했다.



“어? 저 사람 어제 체크인 한 사람 아니야?”

“아니래. 내가 물어봤는데 그 전에는 친구랑 같이 와서 친구 이름으로 여기 묵고 있었대.”

“아니야. 나 분명히 저 사람 기억해. 내가 어제 근무하고 있을 때 도착해서 내가 체크인시켰어.”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겨우 어제 도착한 사람을 내가 얼굴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호스텔 밖에서 저 사람을 마주치기까지 했는데? 그렇다. 길에서 그를 본 것도 사실 같은 날이었다. 내 느낌과 그의 말 빼고는 그가 이 숙소에 오래 머물렀다는 증거가 없었다. 평소에 내가 워낙 사람 얼굴을 잘 분별하지 못하다 보니 내 기억력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그래도 그가 한 말은 믿었다. 우리는 간단한 인사만 나눈 게 아니라 꽤나 긴 대화를 했다. 동네 팔찌 공방 정보도 주고받고 그의 남미 여행 얘기도 들었다. 그랬던 그가 나를 속인 거였다고? 겨우 삼천 원 할인받으려고?



나는 그의 방으로 찾아갔다. 이미 그는 할인받은 금액으로 숙소비를 결제하고 사라져 버린 후였지만 말이다. 호스텔 장부상 달라지는 건 없어도 같은 여행자로서 나는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싶었다. 노크를 하자 그는 이층 침대에서 고개를 내밀며 인사의 눈짓을 보냈다.



“하나 물어볼 게 있어서 왔는데, 혹시 정확히 며칠에 여기 체크인했어?”

“나? 어젯밤.”

“응??? 분명히 나한테 친구랑 같이 왔었다고 했잖아. 여기 오래 있었으니 방값도 깎아 달라고 한 거고.”

“뭔가 오해가 있었나 본데, 아니야. 나 어제 왔어.”






리셉션에 있었던 다른 직원이 자신에게 할인해준다 했다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 한밤 중에 오갈 곳 없을 때는 방값에 동의해놓고 실컷 자고 다음날 아침이면 내가 왜 그 금액을 내야 하냐며 얼굴을 바꾸는 사람 등 그간 돈 앞에서 양심을 파는 여행객들을 많이 봐 왔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충격이 컸다. 그랬다. 동료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았다. 저렴한 가격으로 결제를 마친 그는 그제야 진실을 말했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게 문제가 된다면 그깟 삼천 원 내가 배상하고 말자는 심정이었다. 사실 금전적 손해보다 인간적인 배신감이 상당했다. 길에서 그렇게 반갑게 인사하고 사소한 이야기도 나누며 나는 그와 인간적인 정을 나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방값 할인 앞에서 아주 태연하게 말을 지어냈던 것이다.






호스텔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까지도 이렇게 믿었을 것이다. 낭만과 꿈을 안고 길을 떠도는 배낭여행객이 그럴 리가 없다고. 하지만 그건 잘못된 환상이었다. 그들도 그냥 한 사람이다. 세상 어딜 가나 나쁜 사람이 있듯, 배낭여행객 모두가 착한 사람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이를 확증하는 사례가 점점 쌓여갈수록 아직까지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다.




Photo by Suhyeon Cho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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