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천국

- 시간과 세상에 그냥은 끌려가지 않겠다는 반항

by doctor flotte

네 개의 계절 가운데 여름을 가장 싫어하는 내게, 여름학회는 단지 날씨 때문에 가기 싫은 일이기도 하다. 어제 학회 때문에 경희대를 다녀왔다. 학회는 한시 반 시작이다. 일찍 도착해 학교 앞에서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다. 당연히 메뉴는 냉면이다. 냉면을 먹고 비비빅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나는 여름을 살 수 있다. 모르는 동네에서 냉면집을 찾으려니 많이 걸은 것 같다. 체인점 냉면집은 가기 싫었다. 매운 걸 또 싫어해서 냉면 양념장은 수저로 그대로 덜어내고 냉면을 먹었다. 말 그대로 물냉면이었다. 조금 길을 헤매다가 반갑게도 헌책방을 만났다. 마음에 드는 책이 있어 한 권 샀다. 한슬리크의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 또 한 권을 더 샀다. 비닐봉지에 책 두 권을 넣고 그늘이 있는 한쪽 길가로 피해 걸었다. 학교 교문 왼쪽 청운관 건물. 학회는 항상 기대와 긴장을 가지고 들어서게 된다. 오늘은 어떤 선생님들이 오셨을까.


선생님들이 한 분 두 분 오신다. 어느 선생님은 오늘 발표논문을 쓰는 것보다 회기역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는 게 더 힘들었다고 하신다. 농담 같지 않았다. 멀리서 오시는 선생님이 계신다. 그분이 또 오셨을까 생각했는데, 저기서 반가운 손으로 나를 부르신다. 전주에 사시는 박휘근 선생님. 네덜란드에서 공부하시고 쭉 사시다가 이제는 전주에서 여생을 보내시는 분이다. 나이가 많으신 할아버지 선생님이신데 나는 항상 그분의 건강이 걱정된다. 오늘 같은 날씨에는 안 오셔도 될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오신다. 생각해 보니 작년 여름에도 한 참 더울 때 학회에 오신 것 같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나 서울신학대 올라가는 길에 너무 더워서 나랑 슈퍼 앞에서 쉬었다가 같이 올라갔다. 대구에서도 선생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오셨다. 여기 학회에 온다고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이 더위에 철학자들이 모여든다. 덥고 힘들고 어지러운 날씨에 손수건 한 장으로 땀을 닦으며 먼 길을 오신다.


요즘 학회에는 또 재미있는 분이 한 분 오신다. 나이가 있으신 분이시고 철학을 공부한 분은 아니다. 어떻게 우리 학회를 오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나보다 학회를 더 자주 오시는 것 같다. 혹시 몰라 성함은 적을 수 없지만, 전 국세청장을 역임하신 분이시다. 고시공부와 공직생활로 삶을 살아오셨지만 젊었을 때부터 철학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철학공부가 그렇게 재미있으시냐고 물어봤다. “졸려서 자는 거지, 저는 철학책이 그렇게 재미있어요.” 이분이 요즘 어떻게 사시는지 다 그려졌다.


에어컨 가동이 변변치 않다. 강의실이 더워진다. 전주에서 올라오신 할아버지 철학자는 잠이 드셨다. 앞에서 발표하는 눈치 없는 발표자는 자기철학에 빠져 쉬지 않고 40분째 말을 한다. 나도 지루하고 힘들어서 조용히 일어나 강의실 뒤편으로 가 달달한 과자 하나와 미지근해진 냉커피를 한 잔 따라와 다시 자리에 앉는다. 전 국세청장님은 빤짝빤짝한 눈으로 발표문에 밑줄을 쳐 가며 따라간다. 자존심 하나로 철학을 공부하는 전투적인 대학원생들은 자기만의 깨달음 속에서 오만한 미소를 감춘다. 지금 이 분위기를 글로 남기고 싶었다. 나른한 천국에 있는 것 같았다.


오늘날 철학만큼 쓸모없고 어리석고 무의한 일이 또 있을까? 나는 갑자기 일종의 반항이 아닐까 생각했다. 자기 삶과 이 세상에 대한 고상한 반항. 여기 모인 사람들은 바보이고 반항아가 아닐까 생각했다. 존재, 본질, 예술, 진리, 무, 니체, 아렌트,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하이데거를 가지고 토론했다. 나와 우리는 같이 성실하게 반항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과 세상에 그냥은 끌려가지 않겠다는 반항으로 우리는 충분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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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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