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통 하나의 분노와
필통 하나의 감동

by 영자의 전성시대

수년 전 일이다. 그때의 나는 교육청 파견 강사로 일하며 서울시의 초. 중. 고를 다니며 특강을 하고 있었다. 적게는 한 차시로, 많게는 8차시 정도로 수업했는데 보통은 4차시 단위로 강의했다. 일반적으로 교육청 프로그램을 신청하는 교사는 발 빠르고 교육열이 높은, 정보에 민감한 부지런한 담임선생님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외부에서 손님이 오는 것이라 귀찮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착한 그곳은 오래된 학교로 느낌이 웅장했고 곧바로 교실로 찾아갔다. 인사를 하자마자 담임선생님은 나를 구석으로 데려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선생님 저희 반에 아픈 아이가 두 명 있어요. 언어치료받는 아이도 한 명 있고요. 좀 힘드시겠지만 잘 부탁드려요.” 얼마 전 어마 무시했던 중학교의 경험이 있던 터라 나는 살짝 긴장했다. 아이들이 날아다니는 중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하느라 기도하는 심정으로 울뻔했었기에 자연스레 긴장이 되었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수업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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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한지 20 여분이 지났을 즈음, 한 아이가 빨간 사인펜으로 종이에 낙서를 소리 내어 긋기 시작했다. 아프다는 아이 중 하나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괜찮아, 괜찮아.’하며 나를 다독였다. 좀 더 시간이 흐르니 언어치료를 받는 아이가 욕을 하기 시작했다. 틱이 욕으로 나온 경우라서 아이가 조절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다시 마음속으로 ‘괜찮아’라고 놀라지 않으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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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나의 마음을 건드린 건 구석에 앉아있던 조그마한 남자아이였다. 활동을 하도록 시간을 주는 동안 그 아이는 꼼짝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나는 다가가서 “이거 이렇게 하는 거야. 한번 해볼까?”라고 다시 친절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미동도 없었고 나는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다시 상냥하게 설명했지만 여전한 그 아이에게 “지금 내 말이 들리니? 뭐라도 해야지. 필통이라도 꺼내서 이름이라도 써야 하는 거 아니니?” 하며 화를 냈다. 결국 아이는 필통조차 꺼내지 않고 그대로 그날의 수업은 종료했다. 담임선생님과 만나 그 아이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선생님은 “어머 선생님 죄송해요. 그 아이는 부모님이 안 계셔서 할머니 할아버지랑 사는데 두 분이 힘드셔서 하나도 못 챙겨주세요. 아마 필통도 없어서 못 꺼낸 걸 거예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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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때부터 정신이 멍해졌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가? 안 그래도 아픈 아이 마음에 소금을 뿌렸구나.’라는 죄책감으로 정신이 없었다. ‘몰랐으니까’라고 생각해서 지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예민한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일주일 뒤에 다음 수업이 있기까지 입맛도 없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심지어 그 아이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데 꿈에서도 나타나 마음이 힘들었다. 한 주간 기도하고 ‘이 아이를 위해 어떻게 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 아이를 만나러 가기 전날, 우리 집에 있는 필통들을 모았다. 그중 가장 깨끗한 것으로 고르고 새것 같은 연필과 샤프, 심과 자, 형광펜과 볼펜을 하나씩 넣었다. 새것으로 사서 주면 아이가 부담스러워할까 조심했다. 다음 날 학교에 가니 그 아이가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고 자연스레 줄 수 있는 타이밍을 기다렸다. 중간 쉬는 시간이 되어 그 아이를 조용히 불러 구석으로 갔다. 한 주 내내 기도했던 순간이었다. “지난주에 선생님이 네게 화냈던 것 기억하니? 미안하다. 일주일 동안 내내 마음에 걸렸단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쓰는 필통이 두 개 있거든. 혹시 필요하면 한 개는 네가 가질래?” 하며 필통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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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긴장했던 얼굴을 펴며 환한 얼굴로 머뭇거림 없이 필통을 받았고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이 좋아했다. 그 순간, 한주 내내 걸려 있던 체기가 내려가는 것 같았다. 한 주 동안은 나에게 이 아이의 마음이 제일 중요했기에 아이가 마음을 풀어주는 순간, 나의 마음도 풀어짐을 느꼈다. 그리 마음을 내어준 아이에게 너무도 감사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나에게 죄책감으로 남아있을 뻔한 일이었다.


뒤돌아서 나오며 나는 다시 다짐했다. 아이들에게 말 한마디 허투루 하지 않겠다고, 아이들을 위해서이지만 결국은 나를 위해서라도 정말 조심해서 말하고 행동해야겠다고 결심했던 일이었다. 그 이후로 필통을 보면 으레 껏 그 아이가 드문드문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 아이가 외롭지 않게 잘 자라주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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