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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거인 Jul 27. 2023

김치 담그려던 건 아니었는데

비는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처럼 쏟아졌다.


 세차게  비가 내리던 날, 하루 일과에 김치 담그기 계획은 없었다. 책 읽고 습작하고 오후에는 작업실에 들어가 원피스 한 벌 만들 생각이었다.
 

 유례없이 긴 장마라고 했다. 6월 말부터 시작된 장마는 7월 18일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장마 기간 내내 냉장고 파먹기 하고 텃밭 뜯어먹기만 하고 있었다. 남편 입이 특별히 까다롭거나 반찬 투정하는 것도 아닌데 삼시세끼 밥상 차리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설거지 끝내고 돌아서면 또 무슨 반찬을 만들어야 하나 걱정부터 앞섰다.
  

 비가 잠시 멈추더니 파란 하늘을 보여 주었다. 이때를 틈타 밖으로 나와 텃밭으로 갔다. 매일 쏟아붓는 비 탓에 채소들은 버티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다 자라서 붉게 익기만 하면 되는 멀쩡한 고추도 뚝뚝 떨어지고 오이잎도 호박잎도 누렇게 떠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나마 고구마 줄기와 들깻잎은 잘 버티고 있어 다행이었다. 한 바퀴 돌아보고 고구마 줄기 볶고 깻잎은 데쳐서 들기름에 볶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손댄 일이 커졌다. 고추는 제 그늘도 싫어한다는데 오랫동안 내린 비로 인해 웃자란 들깨가 고추밭에 그늘을 만들었다. 그늘을 없애기 위해 들깨는 줄기째 베었다. 고구마 줄기도 줄기째 끊어 삼태기에 담았다. 나는 음식을 만들 때마다 부족하면 어떡하지? 하며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조금 더 조금 더 하다 보면 일이 커지곤 했다.
 

 흙이 잔뜩 묻은 재료들을 다듬고 씻느라 한나절을 보냈다. 양파와 마늘은 까서 씻어 놓고 밀가루 풀도 끓여 놓았다. 그 와중에 남편은 닭볶음탕이 먹고 싶다며 시내에 나가 볶음용 닭을 사 왔다. 일에 일이 더 해졌다.  감자와 양파 큼직하게 썰어 넣고 닭볶음탕을 만들었다. 설거지는 밥 두 공기를 비운 남편에게 떠넘기고 고구마 줄기를 데치기 위해 물을 끓였다. 팔팔 끓는 물에 소금 한 줌 넣으니 ‘토도도독’ 비명을 지르며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데쳐진 줄기는 건져서 찬물에 헹궈 소쿠리에 바쳐 두었다.  물기가 빠지는 동안 양념을 만들었다. 분쇄기에 건고추를 넣고 갈다가 멸치액젓 한 컵과 마늘을 넣고 다시 한번 돌렸다, 양이 많아진 분쇄기는 힘에 부치는지 ‘드드르르륵’ 신음하며 힘겹게 돌아갔다. 커다란 양푼에 밀가루 풀을 붓고 분쇄기에 있는 양념을 쏟아 생강가루와 약간의 소금을 더했다. 깻잎부터 골고루 간이 배도록 양념을 발라 차곡차곡 통에 담았다. 다음은 부추와 고구마 줄기를 섞어서 버무릴 차례다. 고구마 줄기에서는 특유의 냄새가 나는데 나는 그 냄새를 싫어한다. 부추와 섞어 버무리면 냄새도 사라지고 맛도 깊어진다. 먼저 부추를 삼등분으로 잘라서 미리 만들어 놓은 양념과 버무려 숨이 죽기를 기다렸다가 물기 빠진 줄기를 넣고 함께 버무려 김치통에 담아 꼭꼭 눌러 주었다. 뚜껑을 닫고 허리를 펴니 밤이 깊었다. 뒷설거지는 남편 몫으로 남겨 두고 마당으로 나왔다. 쏟아지던 비는 멈췄고 집 주변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눈은 어둠에 익숙해졌다.
  어둠을 따라 걸으며 하루를 정리해 본다. 읽던 책을 마저 읽으려 했지만 한 줄도 읽지 못했다. 여름 원피스 한 벌 만들어 입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책은 내일도 읽을 수 있고 원피스는 옷장에 차고 넘치게 걸려있다.
 

 어쩌다 보니 계획하지 않은 일로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문득 인생이 계획대로 살아진다면 참 재미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은 별빛 하나 없이 어두웠지만 내 마음은 달빛을 품은 은하수처럼 밝게 빛나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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