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 앞에서 왈칵 울음을 터뜨렸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시나요
대부분의 우리는 타인의 슬픔 앞에서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모릅니다. 어떻게든 이 무겁고 어색한 공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을 빨리 덜어주고 싶은 조급한 마음에 허둥지둥 위로의 말들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늘어놓기 바쁩니다.
"다 잘 될 거야. 시간이 지나면 다 잊힐 거야."
"너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하지만 때로는 그런 정제된 위로의 말들이, 슬픔의 한가운데를 맨몸으로 통과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의 고통을 진단하고, 섣불리 해결책을 제시하려 듭니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마치 빨리 고쳐서 없애버려야 할 고장 난 부품이나, 서둘러 치워버려야 할 장애물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소란스러운 조언들로 텅 빈 침묵을 채우려 안간힘을 쓰지만, 정작 상처받은 마음이 진정으로 기대 쉴 곳은 그런 시끄러운 말들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사전의 다음 장을 넘기며, 저는 호주의 드넓고 붉은 대지로 시선을 돌려봅니다. 그곳에는 수만 년 동안 자연의 묵직한 맥박과 함께 호흡해 온 호주 원주민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데일리 강(Daly River) 유역에 흩어져 살아가는 낭기쿠룽쿠르(Ngan'gikurunggurr) 부족에게는, 현대인들이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가는 아주 깊고 고요한 단어 하나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현재는 극소수의 원주민들만이 그 명맥을 잇고 있어 서서히 소멸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아름다운 언어, 바로 ‘다디리(Dadirri)’입니다.
‘다디리’를 우리말로 완벽하게 번역할 수 있는 단어는 유감스럽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명사나 동사를 넘어, 세상을 대하는 하나의 거대한 영적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굳이 풀이하자면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가닿는 조용한 경청과 멈춤, 그리고 평화로운 기다림’을 뜻합니다. 그리고 호주 원주민 생태학자이자 교육자인 미리암 로즈(Miriam-Rose Ungunmerr-Baumann)는 다디리를 가리켜 "우리 안에 있는 맑고 깊은 우물과도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낭기쿠룽쿠르 사람들은 결코 자연을 통제하거나 재촉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메마른 대지 위에서 우기가 오기를 조급하게 기다리며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강물이 마르면 마른 대로, 물이 차오르면 차오르는 대로 그저 가만히 지켜볼 뿐입니다. 덤불 속에 웅크린 야생 동물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숨을 죽이고 기다리며, 꽃이 피어나는 속도를 앞당기려 하지 않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섭리에 온전히 몸을 맡긴 채, 이 거대한 자연의 흐름을 조용히 관조하며 깊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숭고한 행위를 그들은 ‘다디리’라고 불렀습니다.
이 경이로운 대자연의 언어는, 우리가 타인과 관계를 맺고 서로의 멍든 상처를 어루만지는 방식에 아주 묵직한 깨달음을 줍니다. '다디리'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가져오면, 그것은 곧 ‘당신의 슬픔이 멈출 때까지 아무런 판단 없이 가만히 곁에 머물러 주는 일’이 됩니다.
진정한 위로는 결코 유창한 말 속에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밖에서 동아줄을 던지며 "빨리 잡고 올라와!"라고 소리치는 것은 온전한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다디리'의 위로는, 말없이 그 질척이는 늪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 기꺼이 내 바지 밑단을 진흙으로 적시는 일입니다. 상대방이 마음껏 울 수 있도록 내 어깨의 한쪽을 가만히 내어주고, 섣부른 조언이나 값싼 동정 대신 그저 따뜻한 체온으로 '내가 여기, 네 곁에 있다'는 사실만을 묵묵히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다디리'의 능력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했던 '코야니스카시(미쳐 돌아가는 세상)'의 한가운데를 질주하는 현대 사회에서, 누군가의 슬픔이 자연스럽게 잦아들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주는 것은 너무나 비효율적이고 답답한 일로 치부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에게 재빨리 티슈를 건네며 무언의 압박을 줍니다. '이제 그만 울고 털어버려.' 우리는 슬픔에도 고유한 수명과 계절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타인의 감정마저 내 시간표에 맞춰 1.5배속으로 빨리 감기 하려 듭니다.
그 결과, 우리는 가장 연약한 진심을 꺼내어놓을 안전한 피난처를 잃었습니다. 내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누군가에게 짐이 될까 봐, 혹은 뾰족한 충고를 듣게 될까 봐 두려워진 사람들은 점점 더 깊은 마음의 동굴 속으로 숨어들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수백 명의 사람들과 액정 너머로 '좋아요'를 주고받으며 웃지만, 정작 밤이 되면 홀로 텅 빈 방에서 소리 죽여 우는 이들이 넘쳐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디리'라는 고요한 단어가 소멸해 간다는 것은, 어쩌면 타인의 거친 고통을 기꺼이 품어낼 수 있는 우리의 넉넉한 마음의 품이 그만큼 비좁아졌다는 가장 슬픈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사라져 가는 낯선 말들을 수집해 이야기라는 집을 짓는 동안, 저는 이 조용하고 묵직한 단어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습니다. 이 글에서 파생되는 소설을 쓰며 등장인물이 깊은 상실을 겪을 때조차, 저는 서사를 전개해야 한다는 명목 하에 그들에게 너무 빨리 '극복'이라는 짐을 지워주려 했던 것은 아닐까 깊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슬픔은 억지로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통과하며 충분히 앓고 난 뒤에야 서서히 나에게서 빠져나가도록 허락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다디리'는 결코 무능력하거나 수동적인 방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향해 내가 내어줄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이고 용감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나의 불안을 억누르고 침묵을 견뎌내는 단단한 힘, 상대방의 아픔을 내 마음의 그릇에 흘리지 않고 온전히 담아내는 깊은 인내심이 없다면 결코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 당신의 주변에 어깨가 축 처진 채 걷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혹은 당신 스스로가 캄캄하고 이유 모를 눈물 속에 갇혀 있다면, 부디 낭기쿠룽쿠르 사람들의 낡고 아름다운 지혜인 '다디리'를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억지로 웃게 하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어떻게 된 거냐고 다그쳐 묻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모락모락 김이 나는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고요히 시선을 맞춰주세요. 당신의 얼어붙은 영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내 영혼의 귀를 활짝 열어두겠다고, 네가 이 길고 추운 슬픔의 겨울을 다 지나올 때까지 내가 도망치지 않고 이 자리를 굳건히 지키겠다고. 그 무언의 든든한 약속이야말로, 세상 그 어떤 화려한 수사학보다 강렬하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소통은 넘쳐나지만 진정한 위로는 멸종되어 가는 이 소란한 세상 속에서 길을 잃은 당신에게, 오늘은 호주의 붉은 대지에서 불어온 고요한 바람 같은 단어 '다디리'로 다정한 안부를 묻습니다. 당신의 굽이치는 슬픔이 자연스레 잦아들어 평온한 호수가 되는 그날까지, 저 역시 이 글과 함께 당신의 곁에 가만히 머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