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다이스 키스>
올해 생일에 나는 친구 J에게 만화 [파라다이스 키스]를 선물로 받았다. 좁은 집이 물건으로 꽉 차는 것이 싫어서 책은 무조건 이북으로 사는 편인데, [파라다이스 키스]만큼은 꼭 소장하고 싶었다. ‘패션’을 주제로 다루는 만큼,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실험적인 옷 디자인들과 특유의 화려한 그림체로 표현한 개성 있는 캐릭터들을 작은 액정 화면이 아니라 큰 종이 위의 그림으로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파라다이스 키스]는 단행본 발매 전, 정기 연재를 ‘만화’잡지가 아닌 ‘패션’잡지에서 했을 정도로 패션에 ‘진심’인 ‘패션 만화’라고도 할 수 있고, 만화의 내용이 주인공 유카리가 엄마가 강요하는 입시에서 벗어나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내 ‘패션모델’이 되는 이야기이므로 ‘성장드라마’로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 만화의 정수가 ‘로맨스’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를 만났던 날은 몇 년 만의 최대한파가 예보된 날이었다. 소개팅으로 처음 만나는 날이었지만 예쁜 옷이고 뭐고 얼어 죽을 것 같아서 나는 고민 없이 패딩을 입고 나갔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패딩을 꼭꼭 껴입은 사람들 사이에 홀로 코트를 입고 달달 떨고 있는 그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니, 이렇게 추운데 코트를 입었어요? 얼어 죽어요!”
“와, 나는 소개팅이라 예쁘게 보이려고 코트 입었는데, 혼자 살겠다고 패딩을 입으시다니.... 잘했어요!”
놀란 마음에 인사도 제대로 나누기 전 타박부터 뱉는 나에게 그는 의연하게 웃으며 농담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눴다. 추위에 떨던 남자는 따뜻한 곳에 오자 노곤해져 대화 중에 꾸벅거리며 졸기 시작했지만, 패딩을 입어 마음이 푸근했던 여자는 그 모습이 귀엽게 보였다. 나는 첫인상을 계기로 그에게 ‘김코트’라는 별명을 붙였다.
큰 키와 긴 팔다리, 도도한 인상의 유카리는 입시학원에 가던 길에 예술고등학교 학생인 아라시에게 붙잡혀 졸업 작품을 선보이는 패션쇼에 모델로 서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유카리는 아라시와 친구들이 함께 옷을 만드는 아지트 '파라다이스 키스(약칭 파라키스)'에 끌려가지만, 입시로 마음이 급해 '너희의 놀음에 응해줄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폭언으로 거절한다. 하지만 학생수첩을 떨어뜨리고 가는 바람에, 뒤늦게 파라키스에 도착한 팀의 리더 죠지가 학생수첩의 사진을 보고 그녀에게 흥미를 갖는다.
다음날 유카리의 학교로 찾아간 죠지는 학생수첩을 미끼로 삼아 그녀를 파라키스로 데려와 그가 직접 만든 옷을 입혀 본다. 그 과정에서 유카리는 그들이 얼마나 패션에 진지하게 임하는지 알게 되어 자신의 폭언을 반성하고 사과한다. 본인 의지 없이 엄마에게 휘둘려 사는 유카리는 하고 싶은 일이 명확하고 열정적인 그들에게 부러움을 느껴서, 그들을 닮고 싶단 마음으로 졸업 패션쇼 모델 일을 수락한다.
김코트와 함께하는 데이트는 편안하고 즐거웠다. 유머 코드도 취미도 취향도 잘 맞았다. 그와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그와의 교제를 망설였다. 전 남친과 매번 같은 이유로 싸우고 헤어지면서도 자꾸 다시 만나게 되는 무익한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서 홧김에 받은 소개팅이었다. 헤어진 지 얼마 안 돼 바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왠지 불안하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김코트는 데이트마다 이타적인 태도와 다정한 배려로 나에게 감동을 줬다. 나는 그 덕분에 용기를 얻었고 우리는 결국 사귀게 되었다.
유카리와 죠지는 사랑에 빠져 연인이 된다. 죠지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자유분방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유카리는 죠지와 함께 있고 싶기도 했고, 억지로 하던 입시 준비보다 파라키스 친구들의 일을 돕는 게 좋아서 엄마에게 계속 거짓말하며 학원을 빠진다. 불안감과 죄책감은 모른척한다. 유카리는 연인인 죠지가 이런 자신의 마음을 더 알아주고 돌봐주길 바라지만, 죠지는 '네가 선택한 일은 네가 감당하라'며 차갑게 군다.
대부호인 아버지와 젊고 철없는 모델이었던 어머니의 불륜으로 태어난 죠지는 자신의 삶을 모두 아비지와 죠지의 탓으로 돌리는 주체성 없는 엄마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죠지는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자 뮤즈인 유카리에게 끌리면서도 주체성 없는 모습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그녀에게 본심과는 다른 냉정한 말을 하게 된다. 유카리는 연인에게 계속 한심한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분노와 속상함, 이별 당하기 싫다는 두려움, 누구나 할 법한 인간적 고민도 죠지에겐 이해받을 수 없다는 외로움, 모든 원흉인 자신에 대한 혐오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김코트는 아주 착실하고 성실한,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그것을 실천할 추진력, 끈기 또한 갖고 있어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건설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만날수록 ‘좋은 사람을 만나면 마냥 좋기만 할 거’라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그 바람은 나 역시 좋은 사람이고, 내가 건강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을 때나 가능한 거였다.
나는 금세 그와 나를 비교하며 내가 그에 비해 너무 볼품없는 사람이라고 자책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전공인 디자인이 적성에 맞지 않다고 느껴 학교에 억지로 다니고 있었다. 성적도 별로였고 장래에 대한 계획도 없었다. 내가 그림 외에 무엇을 좋아하는지 전혀 알지도 못했고, 미대에 오기 위해 재수까지 하며 쓴 비용이 아깝고 부모님의 실망이 두려워 전과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자신감 없는 나는 언제나 자신이 넘쳐 보이는 김코트를 동경하면서도 버거워했다.
파라키스 친구들과 지내며 프로 모델이 되고 싶다는 목표를 갖게 된 유카리는 엄마에게 정식으로 허락을 맡고자 꿈을 고백한다. 하지만 고압적인 엄마는 반대만 할 뿐 설득이 되지 않아, 유카리는 뜻을 관철하기 위해 가출을 감행한다. 친구들은 학교도 나가지 않고 모델 알바를 찾는 유카리를 걱정해 말리지만 죠지는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라며 말리지 않는다. 갈 곳 없는 유카리는 죠지의 집에서 동거하게 되어 그와 함께하는 생활에 행복을 느낀다.
유카리는 모델 회사와 계약할 기회를 얻게 됐지만, 미성년자는 부모의 동의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계약 때문에 유카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평소 ‘알아서 하라’는 죠지의 차가운 반응에 계속 상처 입어 왔기에 차마 죠지에게 의논하지 못한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죠지와의 생활이 아예 끝나버릴까 망설이다가 말할 타이밍을 영영 놓쳐 버린다. 유카리가 아닌 친구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죠지는 연인인 자신에게 먼저 말하지 않은 것에 서운함을 느꼈지만, ‘고작 나와 함께 있기 위해 꿈을 미뤄둔다면 한심하다'며 유카리에게 상처 주는 소리만 하고 말았다.
나의 자격지심은 김코트와 매일 나누는 통화를 두렵고 힘든 일로 만들었다. 서로의 일상을 보고하는 평범한 문답에도 나는 솔직히 말하지 못하고 매번 힘껏 거짓말을 지어냈다. ‘오늘 뭐 먹었어?’라는 물음에 ‘응, 귀찮아서 라면으로 때웠어.’라고 답하지 못하고 ‘오늘은 직접 요리해서 먹었어!’라고 거짓말했다. 부지런하고, 요리도 잘하고, 건강도 챙기는 꼼꼼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라면 좀 먹는다고 그가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식의 연락이 반복될수록, 그가 좋아하는 ‘나’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연애가 과연 의미가 있을지 고민하던 어느 날, 전 남친에게서 연락이 왔다.
죠지와의 싸움을 마지막으로 집에 돌아간 유카리는 마음고생과 과로 때문에 건강을 돌보지 못한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 졸업 패션쇼의 하루 전 리허설 날, 드디어 죠지를 다시 만났다는 안도감에 쓰러진 유카리를 보고 죠지는 그제야 ‘나도 널 내내 생각했고, 계속 연락을 기다렸다’는 솔직한 마음을 고백한다. 그로써 두 사람은 화해하지만, 유카리는 삐뚤어진 죠지와 함께 있을수록 자신은 망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다음날 졸업 패션쇼에서 아름답게 완성된 드레스를 입은 유카리는 완벽한 무대를 선보였지만, 결과는 아쉽게 2등이었다. 죠지의 디자인은 너무 예술적이어서 대중이 받아들이기에 호불호가 갈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죠지는 이런 단점을 스스로 잘 파악해서 패션디자이너를 포기하고 헤어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기로 진로를 바꾼다. 재벌의 ‘사생아’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 어떠한 지원도, 유산도 받을 수 없으므로 자립성 없는 엄마를 부양하려면 수입과 바로 직결되지 않는 패션 디자이너의 길을 선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죠지의 사정을 친구를 통해서야 알게 된 유카리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본인의 무력함과 이런 문제로 상의조차 할 수 없는 죠지와의 빈약한 애정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씁쓸함을 느낀다.
친구 J는 나에게 ‘제발 배고프다고 쓰레기 좀 주워 먹지 마.’라고 했다. 다시 전 남친에게 돌아가겠다고 내 결심을 고백하자 한 말이었다. 그를 다시 만나는 것은 내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지금 만나는 ‘좋은 사람’ 옆에서 ‘나도’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며 살면 된다고 나를 달랬다. 하지만 괴로운 나는 그 백번 옳은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혼자 버티기 힘든 상황에, 이미 서로의 허물을 다 알고 있는 편한 사람 옆에서 못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면서 마냥 위로만 받으면서 지내고 싶었다. 전 남친이 잘못했다고 빌고 있으니 그를 용서해주고 받아 준다면, 그가 고마운 마음에 앞으로 더 잘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이후 친구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설득해 어머니의 부양을 약속받은 죠지는 패션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파리 유학을 결정한다. 새해 첫날 죠지는 손수 만든 기모노를 유카리에게 입혀 바다로 함께 떠나고, 일출을 보며 파리로 함께 가달라고 부탁한다. 유카리는 죠지를 너무 사랑해서 계속 함께 있고 싶었지만, 지금 막 시작한 모델 일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죠지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로써 두 사람은 사실상 이별이 결정된 것이었지만 서로의 미래를 위해 올바른 선택이라고 인정한다.
나는 김코트에게 이별을 고하기 위해 고속버스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나와 그의 거처는 왕복 서너 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에 있었다. 그동안은 김코트가 매번 날 만나러 와줬지만, 헤어지잔 소리를 하자고 그에게 이 먼 거리를 와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일부러 와줬다고 기뻐하던 착한 김코트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이별의 이유로 내가 그간 느꼈던 자격지심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게 그를 덜 상처 주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정도 용기가 있었다면, 애초에 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못난 나는 ‘전 남친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반쪽짜리 이유만 말해 그를 더 화나고 상처받게 했다.
굳은 얼굴로 침묵하며 한참을 앉아있던 김코트는 ‘이제 그만 돌아가겠다’는 나를 따라 일어났다. 카페를 나와서도 내 옆에 나란히 걷는 그를 보고 당황한 나에게 그가 말했다.
“이 동네 처음 왔잖아. 길 잃으면 어떡해, 내가 터미널까지 데려다줄게.”
죠지의 출국 날, 차마 가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유카리는 일부러 배웅 나가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집에 유카리 앞으로 죠지의 선물이 도착했고, 선물은 창고 열쇠였다. 패션쇼에서 입었던 드레스가 있을 거라 예상하고 창고로 달려 간 유카리는 창고에 가득 찬, 죠지가 평생에 걸쳐 만든 엄청난 양의 옷들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 추억이 깃들어 있기에 누구에게도 팔 생각이 없다던 옷을 유카리에게 전부 주는 것, 죠지만의 사랑 고백이었다.
김코트에게 배웅받으며 터미널로 돌아온 나는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울었다. 김코트는 내가 돌아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꼭 행복하게 잘 지내야 한다’며 나를 걱정해 주었다. 나는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다시 만난 전 남친과는 허무하게 다시 헤어졌다. 심지어 차였으며, 좋은 직장에 취직해 코가 한껏 높아진 그는 헤어지는 순간에 취준생이던 나를 두고 무시하는 듯한 충고를 해서 나를 두고두고 상처 입게 했다. 아마 김코트에게 잘못한 벌을 이렇게 받은 것 같다.
나는 이 사건 이후로 거의 7년 동안 연애하지 않았다. 내 마음가짐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는 상대로 ‘좋은’사람을 만나든, ‘나쁜’사람을 만나든 연애가 오히려 독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건강하지 못한 마음은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올해 생일 선물로 [파라다이스 키스]를 받아 다시 읽어봤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어렸을 땐 ‘죠지 같은 멋진 남자를 만나서 유카리는 좋겠다.’ 정도의 생각만 했는데, 알고 보니 ‘연애’에 대한 깊은 고찰을 아주 어른스러운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유카리가 죠지에게 계속 휘둘리고 상처도 많이 받지만, 마지막에는 제대로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는 것이 기특했다. 죠지에게 받은 자극들을 좌절하고 안주하는 이유로 삼지 않고 자신의 발전을 위한 발판으로 썼다는 게 너무 대견하고, 그렇게 강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죠지와의 사랑을 아픈 기억이 아닌 ‘좋은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멋있는 유카리의 여정을 응원하게 된다.
아니, 고작 고등학생이 너무 대단한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