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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랖 Oct 01. 2024

Round 5

아버님 저는 봤습니다

그렇게 힘든 장례를 버텨내고 발인날이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늘


“나 죽으면 절대 느그 아버지 옆에 묻지 마라! 강이나 바다에 뿌려 다오. 마음대로 흘러 다니게~”


유언이셨다.

그래도 효자 아들은 어머니를 차마 바다에 뿌리진 못하고

‘느그 아버지 옆에는 묻지 마라’만 들어드리기로 했다.

아버님은 국가유공자시다.  

때문에 돌아가시면 호국원으로 가신다.

물론 배우자 자리도 같이 배정되어 있다.


차마..

어머니의 소원을 외면할 수 없어 호국원이 아닌

추모관에 따로 모시기로 했다.

효도한 번 제대로 못해드린 아들의 마지막 효도였고

너무 빨리 어머니를 보내버린 아들의 속죄였다.


홧병이었다. 공식 병명은 파킨슨병이었지만

주된 요인은 아버님으로 인한 홧병!!

어머님은 아버님이 병수발 해주시는 것도 싫으셨는지 나중에는 쌩으로 굶으셨다고 이웃집 어르신이 말씀해 주시더라.  손주 재롱까지 보고 가셨으면 좋으련만...






어머님!! 다음 생에 혹~시나 다시 태어나시면 ..

결혼하지 맙시닷 우리! 이 좋은 세상 나는 솔로

마음 편히 함 살아봅시다!

힘든 시절에 태어나셔서 고생만 잔뜩하시고 가신 짠한 우리 어머님! 그래도 계신 곳에서는 꼴뵈기 싫은 인간(?) 안보시니깐 마음은 쬐끔 편하시죠?ㅋ

나중에 만나서 제가 어머님 얼굴을 잊었거들랑

“며늘아~ 얘야~”하고 함 불러주세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머님~





장례절차를 다 마치고 천근만근 몸땡이를 이끌고

시댁으로 향했다.

멀리 사시는 형님들은 집정리를 마저 하고 가자신다. 하..

그래! 정신력으로 버틴....


버틸려고 해도 몸이 말을 안 듣는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뭘 정리했는지 기억이 없다.

집으로 돌아와 이틀을 내리 잤다. 기절했다고 본다.

남편에게 울리는 형님들 전화에 정신이 겨우 차렸다.

혼자 계시니 자주좀 들여다 보란다.

그럼 형님들은 언제 ‘자주’ 오실랍니까?



나는 중병을 앓고 있다.

착한딸병,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싶은 인정병, 결혼하고 새로 얻은 효부병!!

한마디로 중환자다.

어렸을때 앓았으니 내가 봤을 땐 지금은 말기환자 그 어디쯤이 아닐까싶다. ‘착한’ ‘좋은‘ 이런 단어들이 내 앞에 붙어야만 되는 줄 알았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인정받으려 정작.

’나‘ 자신이 조금씩 꺼져가고 있다는 건..몰랐다.

타인을 위한 배려만 넘쳐나고

나에겐 늘 배신만 때리는 멍청한 병이다.


가족이 가장 모르고 가족이 가장 상처가 된다는 것도...모르는 똥멍청이 병이다.

놀랍게도 아무리 부정한 대우를 받아도, 속상하고 화가 치밀어도 엄마에게, 계부에게, 시아버지에게..

심지어는 남편에게도 불평 한마디 입밖으로 꺼내지 못했다(결혼후 1년까지는)

그게 내가 지금까지 때리는 친아빠에게서, 또 나를 버리고 도망가버릴까 두려웠던 엄마에게서

배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나만 꾹꾹 참고 버티면 다 해결될것만 같았다. 미련하게도..


를 낼 줄 알아야 했다. 위험한 순간이나 부당한 상황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상대방에게 그만 멈춰!라는 신호를 주기 위해서라도!

화를 낼 줄 몰랐다 나는.. 그게 나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된다는 걸 그때의 나는 정말 몰랐다.

 가슴이 콱 막히는 느낌이 자주 들었지만 분노가 치밀어도 혼자 삭이고 심호흡하 그렇게 버텨낸 세월이었다.


곪을대로 곪아 터지기 일보 직이었으리라..

나는 감정을 숨기고 억압하는 데 길들여져 있다. 어린시절부터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 니가 첫째니까 엄마한테 잘해야 한다. 느그 아빠한테 끌려갔으면 넌 벌써 어떻게 돼불었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한 번씩 오셔셔 늘 하셨던 말씀이시다.

학교 친구들이 와 있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퍼져 친구들이 쑥덕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없는 애라고...매맞고 자랐다고..

그때 알았다.

왜 사람들이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말을 하는지..

그 뒤로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나는 더더욱 말수가 적은 아이가 됐다.



수도꼭지인가 싶을 때가 있다. 시도때도 없이 나온다 눈물이.. 눈물을 받아서 설거지를 해도 될 판이다

눈물좀 안나오는 약은 없나 할 정도로.. 싫었다 창피했다

왜 이리 나약한건지..남들한테 질질 짜는 모습을 보일까 늘 몰래 눈물을 훔쳐내곤 했다.

쌓인 아픔과 상처가 자기좀 알아봐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거였는데...이제 그만 참고 입밖으로 내뱉으라는신호였는데..나는 또 외면했다.

내마음의 신호탄을..

남편과 결혼해 새 가정을 꾸렸지만 그 어마무시한 트라우마는 평생 나를 따라다닐 거라는걸

나는 안다.


아빠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남편에게, 시아버지에게는 받을 수 있을라는 희망의 끈을 그때는

허리춤에라도 꽉 붙들어매고 싶었나보다.


아파도 안 아픈 척, 힘들어도 괜찮은 척, 상처 받은 마음을 돌보는 일보다 ‘착한‘딸에 이어 이제는  ’착한‘며느리'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책임과 의무가 나에겐 늘 우선이었다. 그래야만 결코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 믿었으므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을 유일한 내편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결혼후 2년이 걸렸다.




정신을 차리고 시댁으로 향했다.

나는 말기병환자니까. 바보 똥멍청이 말기병환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반찬도 해갔다.

나는.. 음식을 못한다!  물론 손맛은 있지만(흠흠)

 어르신들 입맛에 맞는 그런 음식들은 아직 미흡하다.

엄마 손을 빌려 이것저것 준비해

아버님에게로 향했다.

울 남편은 지네 집 간다늘 싱글벙글이다.

죽빵을 날려주고 싶은 그마음을 누르고 사느라

진짜 고생했다 . (물론 지금은 날린다 아주 시~원하게)

희한한 일이다. 시댁가는 길은 명절이고 주말이고

절~~~~대   안 막.힌.다....

차라도 꽉! 막혀라도 주면  좋을텐데

이놈의 세상은 도와주는 게 하나도 없다


아버님~ 하고 들어서려는데

어? 안계시네?

집 안을 다 뒤져봐도 안계시고 경로당에 가셨나하고

남편을 보내봤지만 안오셨단다

에 계시나하고 나갔다가 나는 봤다.

마을 정자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며

껄껄 웃고 계신 아버님을...

굉~장히 좋아보이신다.

며느리는 이것저것 마무리하고 음식까지 신경쓰느라 다크써클이 목까지 내려왔는데..


당분간 안와도 될것 같다.


뒤돌아서려는 순간 아버님이 나를 보셨나보다

박장대소하시며 무릎까지 치셨던 손이 슬쩍 내려가는 걸 보니...


장례 후 3일째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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