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초등학교에서도 묻지 않는 부모님의 직업이 스펙이 되는 곳이 있다. 바로 여기! 내가 속한 공무원 집단!
환영회를 가장한 호구조사 퍼레이드!!
근데 어쩜 다 하나같이 부모님이 동장, 읍장, 군수, 교장쌤, 교감쌤이냐.
가장 흔한 부모님 직업이 공무원이다.
공시생 때 일타 강사 전한길 쌤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수능 다음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평한 시험이 공무원 시험이라고...
그 말은 절반만 맞습니다 쌤!
시험은 공평할 지 몰라도 입사 후는 아니다.
아무리 찌질하게 일처리를 해도 부모님이 고위직 공무원이면 그것도 근무부서와 연관성이 있을라 싶으면!! 급부상하게 된다. 주목받게 된다!
부모님이 공직에 안계셔도 남편이 공무원이면 또 큰힘이 된다.
기피부서에 근무하더라도 남편 입김이면 2년 있을거 몇 개월이면 거뜬히 빠져나올 수 있다. 아예 기피부서를 쏙쏙 피해갈 수도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부모 빽없고 거기에 남편 공무원 빽도 없는 핫바리 부류가 떠안게 된다. 그게 바로 나!!!
환영식에서 순서대로 호구조사를 마치고 내 차례!
“00씨 부모님은 뭐하시나?”
술자리에 계신 모든 눈이 나를 향하고 있다.
당연하지!! 우리 부모님은 다른 직원들 부모님처럼 고위직 공무원이 아니시니 사전 정보가 없을 터.
모 아니면 도!라는 눈빛으로 쳐다보고들 계신다. 안보셔도 됩니다 당연히 도!! 입니다.
우리 엄마는 폭력적인 아빠를 피해 도망쳐 나온 뒤로 가정부, 청소부 등등 온갖 허드렛일로 나를 키웠다.
가진 건 빈손이요 딸린 건 어린 딸 2명이라~
국민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인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남들이 가장 기피하는 그런 일들중에 하나. 그 중 택한게 목욕탕 때밀이였다.
어릴 땐 그런 엄마가 창피했던 적도 있었다. 한 번은 옆집 친구가 “00엄마 때밀이래요"라는 소문을 학교에 퍼뜨려 곤욕을 치른적이 있었다.
잦아지겠지 했던 내 생각과는 달리 점점 소문은 퍼져갔고 참다 못한 나는 “야!! 니네 엄마는 술집하잖아!!”하고
꽥 소리를 질러줬다.
순간 그 옆집 친구 얼굴이 뻘개져서 울음을 터뜨렸고 선생님께서 친구들 놀리지 말라고 큰소리를 치신 후에야 아이들 입은 다물어졌다.
미안했다. 아무리 어렸어도 그 말까지는 안했어야 했는데...
그 뒤로 때밀이! 술집! 이런 얘기는 학교에서 들리지 않게 되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흥! 웃기는 소리!!
그 얘기를 한 사람은 분명 귀한 직업을 갖고 있었을 게다. 직업에는 분명! 귀천이 있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다.
내가 살던 시절에는 부모의 직업도 엄청 엄청 중요했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부모 성명란과 직업란이 늘 나를 괴롭혔다.
재혼을 해 성씨가 다른 새아빠를 써넣기는 싫고 안 쓸수도 없고..엄마 직업을 때밀이라고 쓰기도 그렇고...
(나 때만 해도 재혼이 손가락질을 받을 일이었다)
근데 그게 다 큰 성인인 지금까지도 이렇게 나한테 큰 영향을 미칠줄이야..
합격해서 신입사원이 들어오게 되면 그 신상이 이미 털려 돌아다닌다. 부모가 누구라더라 어디 학교 나온 인재라더라 남편이 누구라더라.
흠...가만있어 보자.. 면접 보기 전인가 교육받기 전인가 대기실에서 써냈던 종이 한장이 생각났다. 부모직업이며 형제자매 직업까지 써냈던 기억이 얼핏.. 근무하는 곳에 아는 사람이 있는지..도 써냈던 것 같은데...분명 뭔가 적어서 냈다. 당연히 나는...쓸 게 없었다. 초등학교에서도 안할 짓거리를 여기서는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고 있다.
그런 무리 속에서 생활을 하다보니 나는 그런 부모가 없지만 내 자녀에게만은 나도 떳떳하고 당당한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무모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됐다.
부모 스펙! 남편 스펙은 없으나 이 세상 그 누구도 못 맞춘다는 우리 시아버지 비위도 맞췄던 프로 보필러 아니었던가!!ㅋㅋ윗분 가려운 곳 살살 긁어드리는 일은 일도 아니었다.
근데...부모가 이미 밟아놓은 발자국을 따라 걷는 것과 내가 직접 맨땅에 발자국을 내며 가는 것은 너무나도 큰 차이가 났다. 버거웠다. 게다가 술도 못먹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기 싫은 짓은 안하는 내가 맨몸으로 공무원 사회에서 입지를 다지는 일은 생각만큼 녹록치 않았다. 가장 후회되는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술을 잘 마시지 못한 일!! 알코올 분해 성분을 잔뜩 머금은 간을 갖고 태어나지 못한것이라 말씀드릴수 있겠다! ㅋㅋㅋ(진심 백퍼입니다!)
이 유들유들 성격에 술까지 잘 마셨다면 초고속 승진!! 훗! 따놓은 당상이쥐!! ㅋㅋㅋㅋ
동기들 중에서 사내커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동기들끼리, 아니면 좀더 직급이 높은 분들과 결혼하는 동기들은 나와 같은 선에서 시작해도 결혼과 동시에 저만치 앞서 나간다.
부러웠냐고? 예~ 몹시도 부러웠습니다! 힘든 공직사회 남편이 앞에서 당겨주고 뒤에서 떠받쳐주고 가시밭길 밟을까 진흙밭에 구를까 총무과 찾아댕기며
힘써주고 빼내주고..쬐끔은 부럽습디다!
그렇다고 이미 결혼하고 들어온 거 무를수도 없고 ㅋㅋ 어딜가도 이꼴저꼴 더러운 꼴 다 보게 되어 있는게 인생사 아니것습니까?
누군가 그랬다. 남의 행복을 질투하지 말고 내 불행을 탓하라고 ㅋㅋㅋ 불행만 탓하다가는 남편 몇가닥 안남은 머리 죄다 쥐뜯어놓을거 같아 그냥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살기로 했다.
나에게 힘이 되는 것은 내동기 진영이와 정은언니!
진영이는 나와 같은 무스펙 부모님이고 정은언니는 아버님이 교장쌤이셨지만 정년퇴직하신지 꽤 되셨으니 우리 셋다 뭐 삐까삐까.
진영이는 미혼이고 정은언니는 딸 얘기는 하는데..남편 얘기는 안한다.
오지랖이 넓은 나는 궁금해 죽것지만 ....지성인이니 먼저 말해줄때까지 아무말 않고 기다려주기로 했다.
언젠가는 언니가 말해주겠지.
근데 그 기다림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3년이 지났는데도 남편 얘기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진영이가 갑자기
“언니언니!! 정은언니 사별했나봐!“
이건 또 뭔소리여? 넌 또 우찌 알았냐?
한부모 가족 신청건이 있었는데 거기에 사별이라고 했다고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서운한 마음이 팍! 들었다.
동기 중에 마음나누고 상사 뒷담화 나눴으면 찐친일텐데
그 어마어마한 사실을 나와 진영이만 모르고 있었다고???
저녁먹자고 약속을 잡았다. 진영이랑 나랑 나란히 앉아 언니를 쪼기 시작했다
어쩜 그럴 수 있냐! 왜 남들이 다 아는 사실 우리는 모르냐 우리를 찐친으로 생각을 하고 있긴 하는거냐!!하고 막 침을 튀기며 울분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조용히 듣고 있던 정은언니가 조용히
“그걸 어떻게 내 입으로 말을 하냐.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나 사별했어요 이렇게 말하고 다녀?”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듣고 보니 맞네! 좋은 일도 아니고 먼저 묻지 않는데 언니가 나서서 말하기도 그랬을 거다. 남을 배려한다고 한 내 행동이 언니한테는 상처가 됐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정은언니가 그랬다. 새부서로 발령받아 환영회를 할라치면 자기도 모르게 긴장이 된다고. 결혼했냐 부터 물을게 뻔한데 뭐라고 해야 하나 이것부터 걱정된다고.
어리석었다. 진정한 찐친이라면 먼저 물어봐줄수 있었을텐데..아무렇지 않게 날아오는 질문들을 막아줄 수도 있었을 텐데..누굴 위한 배려였던가.
갑자기 내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소문이 퍼져퍼져 괴로웠던 그 날들이.
정은언니가 털어놓은 사연은 기가 막혔다.
결혼하고 1년 후 아이를 임신했는데 남편이 사고로 사망했단다. 남편없이 홀로 출산했고 시댁쪽은 남편 사망과 동시에 연락을 딱! 끊어버리셨다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 언니가 살아온 인생은.
듣고 있자니 마음이 아파 견딜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다짐했다. 정은언니가 더 상처받지 않게 적어도 직장에서만이라도 방패막이가 되어주자고.
언니가 인사이동을 하면 그 부서 아는 지인한테 연락을 했다. 정은언니 사별해서 딸 혼자 키우고 있으니 그런 질문을 일체 하지 말아달라. 윗분들한테도 넌지시 알려라 등등
지령을 하달했다
내 작은 배려가 언니에게 날카롭게 꽂히는 그 수많은 비수들 중 몇 개는 막아줄수 있기를 바라면서.
부모스펙없고 남편스펙없는 우리끼리 도와가며 살아보세나!!
할 찰나!!
평소 알고 지내는 주사님이 대뜸
“그래서 진영이는 무슨 장애야?” 하는 거다
예? 진영이가 장애가 있어요??
그랬다.
진영이는 신체 오른쪽이 불편하다. 걷는 것도 조금, 손을 사용하는 것도 조금씩 불편하다.
내가 인정이 안됐나보다.
누구보다 야무지고 계획적인 파워 J ! 진영이를 장애인으로 인정하는 순간정말 장애인이 되어 버릴것만 같아 물어보지도 못했다.
진영이도 말은 안했지만 발령받을 때마다 무슨 장애세요? 라고 물어볼까싶어 잔뜩 움츠려들었을것이다.
이젠 그만 진영이의 장애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겠다 싶어 카페에서 만났다.
“진영아! 언니 눈에는 울 진영이가 너무 완벽하게만 보여서 한번도 장애가 있다고 생각해보질 않았어. 너무 미안해. 근데 이젠 언니가 알고 있어야 될것 같아. 너...무슨 장애니? 언니한테 말해줄래?“
늘 씩씩하기만 했던 강인한 진영이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장애를 가진 몸으로 지금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모질고 힘들었을까.. 나도 소리죽여 같이 울었다. 테이블 정리하던 직원이 사연많은 여자둘이라 생각했을 거다.
조용히 눈물만 훔쳐내다 진영이가 겨우 입을 열었다.
태어날 때부터 소아마비였단다.
진영아! 너희 어머니는 너 죽기전에 먼저 눈도 못감으시겠구나 했더니 이젠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나에겐 너무나 완벽한 내 동기다. 장애가 있어도 몸 한쪽이 불편해도 부모가 스펙이 없어도...
이제야 내가 진영이의 장애를 받아들였나보다.
진영아! 그래도 넌 가능해! 공무원 남편 찬스는 남아있잖아 우리! 대작전을 한번 펼쳐보자꾸나!
나랑 정은언니는 글러먹었고 우리의 희망은 오직 너닷!!
그 뒤로 진영이가 인사이동을 할 때마다 007작전처럼 그 부서 지인들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조용히~은~밀하게.
진영이 소아마비 (지체)장애가 있으니까 질문금지!!라고
부모가 고위직 공무원이 아닌 걸 원망한 적이 있었다. 남편이 공무원이 아녀서 억울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어쩌랴
부모는 바꿀 수 없고 남편은 어...음...바꿀 수야 있지만서도 당장은 못하니 ㅋㅋ
그리고 부부공무원 것들!! 이혼안하란 법도 없고 ㅋㅋㅋ 우리 셋이 똘똘 뭉쳐서 이 험난한 공직생활을 버텨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