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3월 말, 아직 아침저녁으로 살얼음의 냉기가 대지 및 훈련소에 남아 있어 모든 것이 을씨년스럽게 기억되는 내 젊음 시절의 한 때이다. 아침에는 얼었다가 낮에는 녹아 질퍽해진 황산벌 각개 전투장에서 낮은 포복, 높은 포복 등 박박 기다 보면 황 톳 물이 안으로 스며들어가 군용 하얀 면 팬티가 누렇게 물들었다. 훈련 기간 중 제일 싫은 것이 야간 화장실 동초 서는 것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병영 생활이 즐거운 것은 아닐 것이다. 모두 잠자는 시간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화장실 앞에서 서 있는 근무를 한다. 밤에 화장실에 들어간 훈련병이 3분이 지났는데도 안 나오면 화장실 문을 뚜드린다. 반응이 있으면 좀 더 기다리고 반응이 없으면 바로 신고해야 한다. 즉, 야간 동초의 주 된 임무는 화장실에서의 자살을 예방하는 것이었다. 용변 후 물을 내리려면 머리 위에 있는 물통에 달린 끈을 잡아당겨야 하는데, 그 끈에 목매다는 사태가 종종 발생했기 때문이다.
훈련소에서 고난의 훈련 과정을 마치고 더블백을 어깨에 맨 채 연무대 역으로 걸어가는 날 저녁은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새로운 곳에서는 좀 편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밤 12시가 넘어서 신병을 가득 실은 수송 열차가 연무대 역을 천천히 출발하였고, 우리는 어디에서 하차할지 모르는 채 기대 반 두려움 반에 김 밥을 사 먹었다. 그때 열차 안에서 먹은 김 밥은 내 생애 가장 맛있는 것으로 기억된다. 매일 훈련소 짬밥만 먹다가 사제 김밥을 사 먹으니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더 먹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 김밥의 단무지 맛이 아직 혀끝에 여운 지어 있었지만 설렘과 기대도 잠깐이었고, 훈련소를 나오면서 받은 형의 편지를 읽으니 다시 맘이 무거워졌다. 어머니의 지병이 날로 악화된다는 내용이었다. 차창 밖을 멍하니 계속 응시하다 보니 편찮으신 어머니 얼굴이 어둠 속에 나타났다가 흔들리며 지나간다.
새벽 열차 안에서 잠깐 잔 것 같은데 기간병이 내 이름을 부르며 하차 준비를 하라고 성화를 낸다. 첫 열차의 정류장에서 내리는 신병은 나를 포함해서 열 명 내외였다. 열차가 서울을 통과할 때까지 못 내리면 전방 근무이니 고생길이 훤하다는 말을 듣고 눈을 붙였는데 제일 먼저 내리라니 이런 행운이…. 경기도 평택쯤 온 줄 알고 내렸는데 동이 터서 살펴보니 아직도 충청도 서대전 역이었다. 거기 본부 부대에서 며칠 머무르다가 다시 따블 백을 매고 열차를 탔다. 천안 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갈아타고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충남의 여러 도시를 거쳐 내 고향 역에 정차했는데도 인솔 기간병은 내릴 기미를 전혀 안 보인다. 여기서 내리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만 뒤에 남기고 열차는 계속 남행하더니 대천을 지나 한 참 지나서 하차하였다. 거기 부대의 대기병으로 몇 주 머무르게 되었다.
대기병 시절에 대졸자 신분인 나에게 당연히 여러 번의 테스트가 들어왔다. 행정병으로 쓸려고 백지를 주면서 글씨를 쓰라고 했다. 무슨 글씨를 쓰면 되냐고 반문하니 인사 장교가 아무것이나 써 보라 한다. 처음에는 고 3 때 한문, 고전 선생님이 재미로 알려 준 김 삿갓의 해학적 한시(漢詩)를 세로로 써 보였다.
“溪邊楊柳不雨長 (계변양류불우장)
後園黃栗不蜂坼(후원황률불봉탁)”
* 坼: 터질 탁
당연히 한 대 쥐어 맞고 번번이 탈락되었다. 한 번은 어느 장교가 이 시 구절이 무엇의 댓 구(對句)인지를 알아채고 재미있다며 다른 것을 써보라 하길래, 이번에는 그 장교를 골탕 먹이고자, 나이 든 선생님이 자주 얘기 하던 반야심경 중의 마지막 부분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薩婆詞(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모지사바하)”을 한자로 갈겨써 보이며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시건방지게 되물었다. 결국 한 대 얻어터진다. 이쯤 되면 그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확정되었다. “고문관”. 내가 원하던 바였다. 본부 행정병에서 탈락되고 말단 부대 소총수로 내 고향 집 가까이로 배치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대기병 시절 행정반 최고참이 나를 불러 앉히고 일과 시간에 바둑을 자주 두었다. 그는 바둑 시작하기 전에 관물대에서 빼빼로를 두 갑 꺼내 놓고서는 혼자 와그작 와그작 앞니로 베어 먹으면서 바둑을 시작했다. 나에게는 먹으라는 말은 절대 안 한다. 날 침 흘리게 만들어 내 주의를 흩트려 놓고서는 이기려는 심보였다. 고참이 먹는 것이니 함부로 손을 내밀어 먹을 수도 없었고…. 그때 얼마나 빼뺴로가 먹고 싶었던지 말로 표현이 다 안 된다. 난 그에 대한 응징으로 필사적으로 대마를 잡아 이겼다. 한 번은 판세가 내게 불리해졌다. 내가 당황하는 꼴을 본 그가 그제야 빼빼로 하나 먹어 보라고 권한다. 빼빼로를 서너 개 먹다 보니 묘수가 생각나 오히려 내가 그의 대마를 잡게 되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그는 빼빼로를 다시 뺏더니 바로 바둑판을 뒤엎어 버렸다. 그리고 화가 나서 행정병을 불러 지시했다. “야, 이 고문관은 눈치라곤 하나도 없고 고집만 센 놈이니 섬으로 보내!”
그래서 난 서해안의 이 섬 저 섬에서 섬 생활의 낭만을 즐기며 편하게 근무하게 되었고, 그때 입대 동기가 자주 불러서 나도 가장 좋아하게 된 노래가 ‘해당화 피고 지는’으로 시작하는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었다. 그러다가 말년 병장 시절에는 고향집 앞 40리 앞 육지에 전진 배치될 수 있었다. 나는 대한민국 육군으로서는 어머니 계신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온 것이었다. 그리고 곧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49재 동안 어머니를 모신 절까지 나는 매주 부대에서 자전거 타고 나올 수 있는 특전을 누렸다. 되돌아보면 다 빼빼로 덕분이다. 난 군대 말년에 갑자기 어머니를 잃고는 그 슬픔에 거의 1년을 어머니의 잔영에 슬퍼했다. 길을 가다가도 쪽 머리에 비녀 튼 노부인을 만나면 꼭 그 앞에 가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어머니인가를 확인하곤 했다. 언젠가는 비녀 튼 쪽머리 노부인이 앞에 걸어가시는 데 영락없는 어머니의 뒷모습이었다. 순간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달려가 그 앞에서 어머니하고 불렀다가 놀라는 그분을 보고 황망히 허리 숙여 죄송하다고 인사하고 쓸쓸히 돌아섰다. 돌아가신 분이 살아오실 리 만무하지만 내 마음속에 머무르며 아직 안 떠나간 어머니는 그렇게 나에게 종종 다가오셨다.
11월 11일 소위 ‘빼빼로 데이’라고 제과 업체의 상술에 따라온 나라 청소년들이 떠들썩했다. 공식적으로 11월 11일은 ‘농업인의 날’이다. 흑 토(土) 자를 파자(破字)하면 십일(十一)이 되기 때문이고, 빼빼로 대신 쌀 소비를 높이기 위해 가래떡을 많이 먹으라는 ‘가래떡 Day’ 이기도 하다.
1985년 2월이었다. 난 노랗게 활주로 세 개 그어진 철모를 쓰고 더블 백을 매고 군용 연락선을 탔다. 조수 간만의 차이가 크고 유속이 빠르기로 유명한 천수만 가운데 위치한 ‘달섬’, 지도에도 안 나오는 조그만 섬에 내렸다. 내가 근무할 조그만 초소는 섬의 가장 높은 부분에 위치하였고 우리의 임무는 바다를 관찰하다가 간첩선으로 의심되는 선박을 검문검색하는 것이었다. 그 전에도 서해 상 다른 조그만 섬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어 두 번째 섬 생활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들뜬 맘이었다. 섬은 반달 모양으로 조그맣고 섬 끝 언덕에는 조그만 초등학교 분교와 당 나무가 있었고 그 나무의 가지를 자르면 비명횡사한다는 섬찟한 경고를 마을 사람들로부터 들었다. 점차 그 섬을 알아 가자 분위기가 더 으스스 해졌다. 섬에는 젊은이라고는 거의 없고 50세 이상의 어민들만 통발을 놓아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물론 전기도 안 들어오고 특히 물이 부족해서 세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초소 뒤에는 처녀가 목매달아 자살했다는 대나무 숲이 있었고 그 앞에 발전기가 있었다. 야간에 탐조등을 돌리기 위해서는 먼저 발전기를 시동 걸어야 하니 그 대나무 숲 가까이에 가야만 했다. 대나무 숲에서 나오는 바다 바람 소리는 언제나 음습하고 기분 나쁜 분위기를 만든다. 거기에 가끔 대나무에 매달린 듯한 흰옷 입은 처녀 귀신의 모습이 보여 총을 장전하고 들어가야만 했다. 귀신이 내 총에 맞아 죽을 리는 없겠지만...
당시 그 섬에는 15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빈집이 하나 있었다. 마을 노인이 이야기해주었다. “이 섬은 ‘달 섬’이라 보름을 의미하는 열다섯 집 만 살아야 돼. 만약 누군가가 이사 와서 열여섯 집이 되면 어느 한 집에 큰 재앙이 닥쳐 결국 다시 열다섯 집이 될 거여.” 얼마 후 그 섬에 육지에서 온 젊은 부부가 그 빈집으로 이사 들어갔다. 무슨 사연이 있어 젊은 부부가 섬으로 이사 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불안한 기색을 보이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어느 따뜻한 봄날 오후 나는 경계 초소에서 따사한 봄 볕을 받아가며 졸고 있었다. 졸다가 눈을 떠보니 바다에서 배 한 척이 통발 놓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배 이름과 작업 인원 2명이라고 경계 일지에 적어 놓고 다시 졸았다. 다시 깨어보니 아까 그 배는 아직 그 자리에서 통통거리며 맴돌고 있는 데 망원경으로 자세히 보니 배 위에 사람이 안 보였다. 앗! 사고로구나.
바로 어통소(경찰)에 신고하였고, 경찰은 새로 이사 온 젊은 부부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동네 사람들은 초보 어부인 젊은 부부가 통발을 놓다가 그물에 발이 걸려 부부 중 한 명이 바다에 빠지자 그를 구하려다 같이 익사한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열다섯 집이 되었으니 그제야 재앙이 그들을 비껴간 듯 안심하는 분위기를 보고서는 갑자기 그 섬이 소름 치도록 무서워졌다. 처음에 믿지 못했던 마을 노인의 말이 신탁(神託)처럼 운명적으로 현실화된 것이었다.
운명이라는 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인가? 오이디푸스의 운명처럼 비극의 주인공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신이 쳐 놓은 운명의 그물망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때론 그런 운명을 불평 없이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나? 사주팔자도 운명이고, 업(業, Karma)의 결과도 운명이며 인연(因緣)도 운명일까? 운명은 아주 큰 정말 거부할 수 없는 꼬뚜레일까?
인연이나 인과응보 등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우주의 근원과 만물 실상의 원인을 규명하는 연기론(緣起論) 까지로 확대한다면 정말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이 연기론은 너무나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이라, 일반인들은 그저 내적 요소이고 직접적인 원인인 인(因)과, 외적 요소이고 간접적인 요소인 연(緣), 그리고 그 인과 연의 만남 결과인 과(果)로 간단하게 이해하고자 한다. 또 일상에서 일어나는 좋거나 나쁜 일들을 인간의 의식적 활동인 업(業)과 그로 인한 결과인 보(報)로 간단히 이해하여 인과응보 또는 인과 업보라 하여 인생사를 쉽게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때론 업보라 치부하며 자신에게 온 운명을 합리화하거나 체념하게 된다.
씨앗이 인(因)이라면 토양과 햇볕이 연(緣)이 되고, 잘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면 그것이 과(果)가 된다. 인연이 있어 만난 사람끼리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아껴주면 분명 마음속에는 그 보(報)로서 행복이 자랄 것이다. 이게 내가 이해하는 평범한 수준의 인(因)과 연(緣) 그리고 업(業)과 보(報)이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인과 연이 얽히고 결합되어 나타나는 유형적과(果)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을 거 같다.
이선희의 ‘인연’이란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게 있다.
"취한 듯 만남은 짧았지만
빗장 열어 자리했죠
맺지 못한대도 후회하진 않죠
영원한 건 없으니까"
좋은 인연(善因)이 있어 짧게 만났더라도 그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간직하니 ('빗장 열어 자리했죠'의 해석으로 이는 업에 해당), 그로써 행복한 것이고, 그 결과인 가정이라는 유형적과(果)가 없더라도 후회는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우리 세대는 고등학교 1학년 국어 책에 나온 금아 피천득(琴兒 皮千得)의 ‘인연’이라는 수필을 기억한다. 금아가 열일곱이 되던 해, 동경 하숙집 주인 딸 아사코는 유난히도 금아를 따르던 여자 아이였다. 금아는 아사코를 작고 예쁜 꽃인 ‘스위트피’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첫 만남 후 헤어질 때 아사코는 지은이의 목을 안고 뺨에 입을 맞추며 아쉬워한다. 십 년이 지난 후 두 번째로 동경을 방문하면서 금아는 아사코를 다시 만나게 된다. 이때의 아사코는 마치 목련 꽃같이 청순하고 세련된 모습이었으며, 약간은 서먹한 만남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아사코를 만난 것은 그 후로 십여 년이 흐른 뒤였는데, 시든 백합같이 초라한 아사코의 모습과
악수도 없이 절만 몇 번씩 하고 헤어진 마지막 만남에 금아는 아쉬움을 느낀다. 세 번의 만남에서 아사코는 모두 꽃의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으며, 아사코와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지만 잊지 못할 인연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다시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는 마지막 부분의 표현에서 아사코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아쉬움 그리고 인생에 대한 달관이 엿보인다.
2002년 KBS는 미국에 살고 있는 83세의 아사코를 수소문하여 찾아내고서는 서 방송에 출연한 금아에게 물었다. 아사코를 찾았으니 만나 회포를 풀고 싶지 않냐고. 93세의 금아는 깜짝 놀랐으나 만나기를 거부했다. 운명이든 인연이든 그저 순응하려는 달관자의 태도였다. 인(因)은 있었으되 남의 손을 빌어 억지로 연(緣)을 만들고 그 꼬뚜레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았다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