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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정작가 Apr 12. 2024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관계가 좋아

# 수필 2



  살아오면서 수많은 인연을 맺고 헤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어떤 인연은 여름밤의 불꽃처럼 아름답게 그리고 화끈하게 피어올랐다가, 순식간에 식은 잿더미로 변모하였고, 어떤 인연은 매일 들락거리는 산책로에 듬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아름다운 바위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그리고 우직하게 언제나 그곳에서 저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한 때의 저는 어리석게도 바위의 존재를 인지하지도 못했고, 바위의 가치를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시간이 흐르며 아주 작고도 사소한 호기심이 바위를 발견하게 하였고, 더 나아가 감사하게도 소중한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로 발전하였습니다.





  천공을 아름답게 밝혔던 짧고도 강렬한 인연들은 너무도 매혹적이었습니다. 가끔, 저를 속박하고 있는 속세의 걱정들로부터 해방시켜 달콤한 꿈을 속삭이기도 하였고, 짧았지만 강렬했던 시간들이 제게 한 편의 그림처럼 남겨졌으니까요.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쉽고 빠르게 맺어진 인연의 무게는 그토록 가볍다는 걸. 아무런 경계도, 시간도, 존중도 없이 순간적인 욕구와 충동에서 빚어진 행동의 결말은 늘 후회와 비참을 남긴다는 것을요. 저는 그토록 아름답지만 가벼운 "관계놀이"를 반복하면서 가벼이 떠나 버린 인연을 하염없이 되새김질 하길 바빴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불꽃놀이는 한순간의 즐거움이었지만, 바위는 평생 저의 곁을 지켜왔다는 사실을요. 저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바위는 부모님, 형제들, 1년 동안 서서히 친해진 직장동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제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고, 저의 의사를 물었으며, 생각과 감정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무정이 너는 떡볶이 안 좋아하잖아."


 "언니는 알리오올리오 파스타를 좋아하니까 그걸로 주문하자."


 "저번에 샀던 슬리퍼가 너무 만족스러워서 네 거도 사주더라. 푹신하고 좋지?"


 "무정아 너 시간 되면 같이 산책할래? 이 근방에 야경이 정말 예쁘거든."




  우리들이 나누는 사소한 대화들은 서로를 향한 따뜻한 관심과 배려, 사랑이 듬뿍 담겨있습니다. 그들과 함께하는 30분의 시간은 일주일의 노고를 보상해 주듯이 저를 치유해 주었고, 저라는 존재가 무의미하지 않다는 사실을, 저라는 존재가 소중한 사람임을 잊을만하면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손가락에 꼽는 적은 관계들이, 험난하고도 어려운 세상을 견뎌 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들은 강렬하지는 않더라도 온돌방의 따뜻한 온기가 얼어붙은 제 한 몸을 서서히 녹이듯이 천천히 그러나 포근하게 저를 에워싸줍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익숙함" 속에서 "소중함"을 찾는 과정들이요. 매일 얼굴을 마주했던 부모님과 같은 배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형제들의 경우 특히나 서로에 대하여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태생이 같기 때문에 서로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우리 집 강아지보다도, 이웃집 할아버지 보다도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언니가 어떤 부분에서 예민해지고, 어떤 행동을 할 때 기분이 좋아지는지 등과 같은 것들을 전혀 모를 때도 있었어요. 그랬기에 우리는 서로를 더욱 이해할 수 없었고, 갈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비극이 또 있을까요. 가정이라는 울타리 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할 수 없으니, 외부의 관계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 말이에요.





  저는 누군가와 깊은 인연을 맺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가족들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제게 "인생에서 네가 잘한 일이 뭐야?"라고 묻는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20살 때 친언니에게 진심 어린 편지를 쓴 날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성향이 극단적으로 달랐던 우리는, 물어뜯기 바빴던 한 때를 지나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제가 앞으로 한걸음 내딛을 때면 언제나 친언니가 뒤에서 저의 등을 밀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속상하고 힘이 들 때, 전화기를 들어 서로의 안부를 묻고, 타인과 맺은 관계가 위태로워서 자신에 대한 혐오와 의심이 싹틀 때, 이토록 안정적이고 편안한 관계로 되돌아와, 재정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우리 근처에 너무도 익숙한 얼굴들에게 작은 관심과 호기심을 가질 수 있다면,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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