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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공주 Nov 01. 2024

공주와 P 혹은 J

 1년 전인가 2년 전부터 한국에 엠비티아이라는 것이 유행을 하기 시작했다. 정식 검사를 받아본 것은 아니지만 핸드폰으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엠비티아이 검사를 해보았다. 검사를 할 때마다 다른 것들은 항상 똑같이 나오는데 매번 다르게 나오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P와 J다. J는 판단형 P는 인식형이라고 하는데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이미지 상으로는 J는 부지런하고 계획적인 사람, P는 즉흥적인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나는 계획을 짤 일이 없었다. (글을 쓸 때마다 느끼지만 나는 참 편하게 살았던 것 같다.) 아무래도 공주로써 국가에서 진행하는 행사들에 참여해야 하니 준비 과정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나의 모든 스케줄을 관리해 주었다. 나는 그저 “공주님, 다음 일정은 ***으로 이동하여 ***을 하시는 것입니다. 공주님 **까지 ****을 준비해 주시면 됩니다.”라고 말하는 담당자들을 말을 따를 뿐이었다. 내가 계획하는 것이라곤 그저 일정을 마친 후 저녁 메뉴로 셰프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부탁할지, 혹은 친구들과의 개인일정을 넣을 수 있는 시간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모든 공주들이 이런 것은 아니다. 나보다 주체적인 공주들도 정말 많다.) 말을 잘 들어서 그런 건지 별 생각이 없어서 그런 건지 나는 계획된 일정을 충실히 잘 수행하는 편이었다. 시키는 데로만 하면 착착 진행이 되니 오히려 편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는 아무도 나에게 무언가를 시키지도 지시하지도 않았다. 늦잠을 자도 아무도 나를 깨우지 않고, 집에 있는 나와 세바스찬 말고는 내가 밥을 늦게 먹었는지 빨리 먹었는지 아무도 모른다.(아빠가 가끔 궁금해하긴 하지만) 병원 예약 시간에 늦게 되어도 아무도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내 하루가 온전히 나에게 달려 있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감과 해방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나중에 취업을 하게 되면 바쁠 테니까 라는 핑계로 아무 계획 없이 지내보기도 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밖에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누워 있고 싶으면 계속 누워 있고 그렇게 한 달 정도를 지내다 보니 이건 그냥 계획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생각이 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밤에 잠이 안 올 때 당시에 유행하던 슬라임 영상을 자주 봤었는데. 그 슬라임이 된 기분이었다. 손에서 주무르고 계속해서 반죽을 하면 재미있는 소리와 질감을 느낄 수 있지만 손에 쥔 채로 가만히 올려놓으면 지저분하게 녹아버리는 슬라임말이다. 나는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궁전에서처럼 나를 마구 반죽해 줄 손을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날 나는 종이에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적어보았다.

 <밥 먹기, 세바스찬 산책하기, 집 청소하기, 빨래하기, 아빠한테 연락하기>

 꾸역꾸역 적어보니 5개 정도가 나왔다. 그리고 적은 일들을 하나씩 해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을 끝낼 때마다 펜으로 글자 한가운데를 쭈욱 그어주었다. 사실 어제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매일 하던 일이었다. 달랐던 점은 내가 오늘 어떤 일들을 했는지 기억하고 미리 예상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선이 죽죽 그어진 종이 한 장이 엄청난 뿌듯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내가 J인지 P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아마 J가 보면 “저게 무슨 J야?”라고 할 것 같고 P가 보면 “P가 무슨 저래?”라고 할 것만 같다.) 그냥 일정에 맞춰 이동을 하다가 예쁜 노을을 보게 되거나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잠시 앉아 시간을 보내고 다시 내 일정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여유로운 사림이 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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