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오나 하던 가을이 드디어 왔다.
나는 가을을 한국에서 처음 경험했다. 내가 살던 왕국에는 겨울과 여름밖에 없었다. 날씨가 많이 춥고 덥다 보니 실내 생활을 주로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옷차림이 계절에 따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옷을 골라 입기보다는 그날 왕궁 행사에 따라 골라주는 옷을 입었다. 이렇게 쓰고 나니 엄청나게 수동적인 인간으로 살아왔던 것 같아 조금 부끄럽다.) 한국에 올 때 내가 입던 옷을 가져왔지만 거의 입지 못했다. 한여름에 한국에 도착한 나는 한동안 밖에 나가지 못했다. 아무리 시원한 옷을 입어도 쨍쨍하게 내리쬐는 태양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가을은 내가 경험한 계절 중 가장 환상적인 계절이었다. 오전에는 햇살이 따스하게 느껴져 반팔을 입던 긴팔을 입던 기분 좋은 뽀송함을 유지할 수 있었고 저녁이 되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 부드러운 카디건을 걸쳐 입으면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었다. 나는 가을에 입기 좋은 옷들을 마구 샀다. 마침 알바를 시작하고 첫 월급을 탄 시기여서 거의 월급의 70프로를 가을 옷 구매에 사용했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워서 입을 수 없는 가죽재킷, 다양한 재질의 카디건, 가을옷의 정석인 트렌치코트, 가을에만 입을 수 있는 얇은 니트 등 가을을 즐길 생각을 하며 신나게 옷을 샀던 것 같다. (내가 한국에 와서 저지른 첫 번째 어리석은 짓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정확히 2주일 하고도 하루 뒤, 나는 옷정리상자를 사서 내가 샀던 가을 옷들을 곱게 게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올해 또 가을이 왔다. 올해 가을은 너무나 늦게 왔다. 추석쯤엔 원래 긴팔을 입었던 것 같은데 올해는 너무 더워 반팔을 입고 지냈다. 옷상자에서 가을 옷들을 전부 꺼내려다가 내가 좋아하던 가죽재킷 하나만 꺼내고 상자를 닫았다. 가죽재킷을 옷걸이에 걸어놓고 밖에 나가기 전 나는 반팔 위에 너무 많이 입어 소매가 해진 후드집업을 걸쳐 입었다. 밖으로 나가니 선선한 바람이 앞머리를 뒤집어 까고 지나갔다. 앞머리는 오대오로 갈라져 이마가 훤하게 드러났다. 그래 이게 가을이지. 오늘따라 버스가 너무 늦게 온다. 핸드폰에 알람이 뜬다. 정류장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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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만, 사지는 않고 구경만 해보자. 손가락이 나도 모르게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