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하던 블로그에 협업 관련 메일을 보냈다는 댓글을 보고 오랜만에 메일함을 열었다. 메일을 확인하고 나오려는 순간 광고성 메일 더미 사이로 엄마의 이름 세 글자가 눈에 띄었다.
엄마와 오래도록 연을 끊고 살았다. 무책임하고 나쁜 엄마지만 하늘이 맺어준 부모와 자식이라는 인연의 끈 때문일까, 하늘 아래 떡하니 살아있는 엄마와 연을 끊고 지내자니 늘 마음 한켠이 불편하고 쓰라렸다.
엄마는 드문드문 메일을 보내왔었다. 내용 없이 제목만 있는 메일, 나에게 서운하다는 내용의 메일, 생일 축하한다며 미역국 먹고 출근하라는 메일 등이었다. 어느덧 생일에 미역국 안 먹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제목만 보고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세월이 흘러도 엄마는 내 생일을 잊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픈 건지 그리운 건지 알 수 없는 감정에 조용히, 아주 오랫동안 울었다.
보고 싶고 그리운 하지만 만나선 안 되는 인연이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내 행복을 위해서, 내 인생을 위해선 늘 발목을 잡는 엄마와 멀어져야 한단 걸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나는 형제도 없고 하나 있는 가족인 아빠마저도 일하지 않는 백수다. 기댈 곳이 없고 가족을 떠올리면 외롭고 공허하다. 그래서 이런 엄마의 관심에 나는 너무도 취약하다. 독하게 마음먹고 빠져나왔지만 정신 차리고 보면 또 제자리다. 엄마가 보고 싶다. 따뜻한 관심에 목마른 나는 그 무엇보다도 포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가보다. 밍밍하고 대충 만든 엄마의 미역국이 먹고 싶다.
오랜만에 엄마를 찾아가 볼까 하다가도 또다시 다투고 상처받아 뛰쳐나올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는 여전히 입맛대로 휘두를 수 있는 아이 같은 자식을 그리워하고 있다. 어린 시절 나는 웃음 많고 명랑했지만 엄마의 기분에 따라 곧 기가 죽곤 했다. 늘 엄마의 기분을 살펴야 했고, 내 감정의 선택권은 없었다. 자유가 박탈된 채 인형처럼 살다가 사춘기가 오고 독립적인 성향이 생기면서 엄마와의 관계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엄마의 기분에 따라 혼나고 슬퍼하는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됐지만 여전히 엄마는 내게 순종적인 아이의 모습을 바랐고 비 오는 날 가진 짐을 다 싸서 나오며 결심했다. 엄마와 거리를 둬야 나로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그러니 이 악물고 혼자 살아남아야 한다고. 혼자 살아남기 위해선 독해져야 했다. 마냥 밝기만 해선 험한 세상에 살아남을 수 없었다. 좀 더 차갑게 현실을 바라봐야 했고 두꺼운 방어막을 쳐야 했다.
엄마는 기분대로 맞춰주던 순종적인 자식의 모습을 그리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순종’과는 거리가 먼 ‘독종’에 가까운 자식이다. 엄마는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도 엄마만의 이상적인 자식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마찬가지로 나도 있는 그대로의 엄마가 그리운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신경 써주고 관심 가져주는 따뜻한 존재를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엄마’라는 이미지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기다려주고 감싸주는 따뜻한 모습이니깐.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는데, 세상에 한 번도 존재해 본 적 없는, 바랄 수 없는 이상적인 엄마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나 엄마와는 거리를 두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주 놓아버릴 수는 없어서 메일함을 열고 답장을 보낸다. 따스하고 다정하게, 하지만 돌아오는 답장은 역시나 나를 탓하는, 묻는 말에 답하지는 않는 일방적인 소통이다. 슬프지만 이렇게라도 어딘가에 엄마가 존재하고 조금이나마 소식을 알고 지낼 수 있음에 감사하며 오늘도 ‘딸깍’ 전송 버튼을 누른다.
내게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면 나는 누군가의 따뜻한 국물이고 싶다. 정성을 담아 만든 든든한 한 끼이고 싶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반겨주는 내가 그리고 바라온 엄마의 모습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