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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ug 09. 2024

책임감 따위, 개나 줘버렸다


 또, 퇴사해 버렸다.

 

 서른셋, 이제 그만 방황하고 정착할 때도 됐는데 캐비닛에 있는 짐을 모조리 챙겨 나와버렸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짐을 챙기자. 다시는 안 올 수도 있으니 불필요하게 얼굴 붉히며 마주칠 일 없도록 다 챙겨 나오는 거야.’

 

 남자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내가 힘들 때 어김없이 나타나 나의 편이 되어준다. 든든한 내 지원군.

 이렇게 도망치듯 나와도 되는 걸까. 이 나이에 또다시 퇴사했다가 내 인생이 망해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으로 퇴근하기 전까지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한결 마음이 나아졌다.

 

 통화를 마치고 바로 대표님께 연락했다. 상황은 설명하되, 세세한 본심은 뒤로 한 채 퇴사를 알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 그대로 ‘도망쳐 나왔다‘.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도 잠시, 내가 입사하기 전 다섯 달 동안 다섯 명이 나갔다고 왜 자꾸 사람들이 도망가는지 모르겠다고 제입으로 한 대표의 말을 떠올리며 나도 그들을 잇는 여섯 번째 도망쳐 나온 사람 중 하나쯤으로 기억될 테니, 괜찮다고 나를 달랬다.


 인생을 정말 책임감으로 가득 채워 살아왔다. 책임감 없이 나를 방치한 부모님에 대한 애증 때문에 책임감 없는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 그래서 나는 더, 책임감 있게 살아야지, 모든 일에 책임을 다 해야지 하며 힘들어도 꿋꿋하게 맡은 일을 책임지며 살아왔다. 그런 나의 첫 도망이었다.


 걱정과는 다르게 속이 후련했다. 가끔은 책임질 만한 가치가 없다면 망설이지 않고 나올 필요도 있단 걸 깨달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었나 보다. 오래간만에 푹 자고 일어났더니 원래의 내 모습을 찾았다. 일 다닐 땐 그저 휴무만 바라보고 사는 피곤에 절어 퉁퉁 부은 사람 1일뿐이었는데 이제는 하루하루가 기대되고 즐겁다. 얼마만의 달콤한 휴식인가!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느새 하고 싶은 것을 뒤로한 채 묵묵히 돈을 벌어 모으는 것이 되어버렸다. 나도 수많은 어른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견뎌왔지만 역시나 나라는 사람은 행복과 자유를 뒤로 할 수 없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무슨 일을 하든 소소한 행복을 갖고 갈 수 있어야겠다.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한 달의 기간을 두고 후회하지 않을 시간을 보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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