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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 후선 Aug 17. 2024

그날

모임에서 한 친구가 조금 늦게 와서는  “역시 돈을 벌어 봐야 해” 하며 싱글벙글 딸 얘기를 한다.

딸이 대학원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아르바이트해서 첫 월급을 받았다. 요즘은 첫 월급 받은 자식이 부모에게 빨간 내복을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수고한 자식에게 선물해야 한다. 그래서 딸에게 축하선물로 백을 사주려고 딸과 함께 백화점에 갔다. 그런데 백을 사지 않고 그냥 돌아왔다. 평소라면 백과 다른 몇 가지를 더 사 달라 졸랐을 딸인데, 백 가격이 본인이 한 달 꼬박 아르바이트해서 받은 월급보다 커서 차마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이 학년 때의 일이다. 앞집아줌마가 일손이 모자란다며 주말에 우리 둘 보고 고추 심으로 갈 수 있냐고 물으셨다. 용돈이 필요했던 언니와 나는 좋아라 승낙했다. 약속한 날,  고추밭이 이웃 동네에 있기에 차가 새벽 5시에 왔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도 못 먹고 겨우 일어나 비몽사몽인 채로 출발해야 했다. 빈속인데다, 잠도 모자란데다, 남의 돈을 받고 하는 일인지라 참으로 힘들었다. 아무리 공짜인력을 좋아하시는 우리 아부지도 새벽 5시에는 일을 시키지 않으셨기에 처음 겪는 고강도의 노동이었다. 어린 마음에 혹시나 시간 전에 끝나면 집에 가라 할까 싶어 남은 밭골을 힐끔힐끔 쳐다보았지만,  끝이 보이지가 않았다. 그렇게 죽을랑 말랑할 때쯤 오전 참이 나왔고 배가 든든하니 그 이후는 덜 힘들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육체적으로 제일 힘든 날이 ‘그날’이었다. 그때부터 내 모든 힘든 기준은 ‘그날’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름 힘든 일이 많았지만, 그때 비하면 참을만했다. 그렇기에 웬만큼 힘든 상황은 ‘그날’ 덕분에 참을 수 있었다. 그렇게 제일 힘들었던 ‘그날’이 내 삶에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아들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웨딩홀 지배인이 주말에 서빙 할 사람 없냐기에 나는 우리 애들을 소개했다. 웨딩업 이란 게 봄가을의 주말 몇 주가 피크인지라 피크 땐 늘 사람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평소엔 공부에 방해된다며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마침 중간고사 마친 주말이라 어차피 집에 있어도 빈둥거릴 걸 알았던 남편은 허락했다. 아이들은 물론 땡큐 땡땡큐였다.      

막상 가려는 날 아들이 몸살 때문에 열이 났다. 나는 아픈 몸으로 일하기엔 무리지 싶어 가지 말라 했다. 하지만 아들은 기어코 간다 했다. 아빠의 야박한 용돈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으니 그 기회를 놓치기엔 아까웠을 것이다. 책상에 앉아만 있어 봤지 일을 해본 적 없던 아이였다. 그냥 누워만 있어도 힘들 텐데 열나는 몸으로 남의 일을 하루 종일 버텨야 했으니 힘든 건 안 봐도 비디오 였다. 


그렇게 아들도 나와 똑같은 경험을 했다. 아들 역시 ‘그날’이 모든 힘든 날의 기준점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그날’이 아들의 삶에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다. 나처럼.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부터 모든 경제를 본인이 책임지고 있다. 부모가 되어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아마 우리 부모님도 스무 살의 우리를 그런 마음으로 바라보셨을 것이다. 자식을 낳고 길러봐야 부모 마음 안다더니. 이래서 자식을 낳아봐야 어른이 된다는 것이구나. 옛말 그른 게 하나도 없다더니 참으로 맞는 얘기구나. 

힘들다고 해서, 안타깝다고 해서 마냥 품을 수만 없는 노릇 아닌가? 어미 사자가 새끼를 벼랑으로 떨어뜨릴 때 그 마음이 어찌 편할까? 엄마 사자는 마음이 힘들었을 것이고 어린 사자는 몸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미 사자와 새끼 사자는 그걸 버텼기에 밀림의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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