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현은 두 개의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며 일보다는 ‘시’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시상이 떠오르려는 듯 말 듯했다. 추상적인 이 느낌을 잘 잡아채면 순식간에 시 한 편을 써 내려갈 수 있다. 시를 쓰고 싶은 마음에 업무를 시작할 수 없었다. 주말을 지낸 후 맞이하는 월요일이라 특히 더 그랬다. 주말 동안 시를 쓰고 읽으며 시의 세계에 빠져 지내다 보니 현실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점심을 먹고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한판 떨고 나면 그나마 에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었다. 카페인 수혈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채워지는 수다는 회사에서 하루를 버티는 힘이다.
팀장님께서 오늘 파견근무를 온다고 했는데 아직인가? 새로운 팀원이 온다니 궁금했다. 팀원 중 남자가 많아서 여자가 왔으면 하고 내심 지현은 기대했다. 새로운 팀원이 언제쯤 오려나, 고개를 쭉 빼고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10시가 다 되어가도 아직이었다. 아무리 자율 출근 제여도 그렇지. 너무 늦는 거 아니야. 새로운 부서로 첫 출근 하는 날인데 늑장을 부리는 게 아닌가 싶어 탐탁지 않았다. 새로운 팀원이 뺀질거리는 사람이 분명하다고 지현은 생각했다. 그러다 꼰대 같은 자신의 모습에 놀라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멈추었다.
몸이 쳐지는 오전이지만 넋 놓고 있다가는 오늘 할 업무를 소화하지 못해 야근으로 이어질지도 몰랐다. 야근하지 않으려면 마음을 잡고 슬슬 시동을 걸어야 했다. 하나의 업무를 마치고 다른 팀원에게 메일로 파일을 전송했다.
지현이 기지개를 켜며 몸을 뒤로 젖혔을 때 대각선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색 슬랙스에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반 뿔테 안경을 쓴 그는 어딘가 지적이었다. 지현은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현이 있는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도 슬로 모션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상 현상이었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경험한 것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업무에 차질이 생겨서 처리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팀장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어서 오라는 듯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연락받았네. 마무리 짓고 오느라 수고했어. 다들 하던 일 멈추고 잠시 이리 와 앉지.”
팀원들은 일제히 사무실 가운데에 놓인 회의용 테이블에 앉았다.
“영진 사업장에서 한 달간 파견 온 새로운 팀원일세. 인사하게나.”
“안녕하십니까, 영진 사업장 그래픽 부서에서 온 디자이너 서윤입니다.”
지현은 이름이 외자냐고 물었고 윤은 짧게 “네.”라고 답했다. 윤은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외모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익숙하고 친근할 리 없잖아. 지현은 윤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혹시 우리 어디에선가 본 적 있나요?”
윤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지현은 그제야 머쓱해져서는 카디건을 여미며 “아, 네네,”하고 말했다. 윤은 지현의 옆자리에 배정되었다. 지현은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낯을 가려서 처음 본 사람과 옆자리에 앉는 걸 불편해하는 지현이 었지만, 윤은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원래 알던 사람이었던 듯한 느낌은 오히려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기다렸다는 듯, 과장 김현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굽신거리며 말했다.
“팀장님, 오늘은 어떤 음식이 당기시나요? 원하시는 데로 모시겠습니다.”
팀장은 옷걸이에서 겉옷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게 거기지 뭐 별거 있나. 나가면서 정하지.”
과장 김현영과 팀장이 사무실을 나가자 팀원들은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현은 오늘 첫 출근 한 윤에게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다. 지현은 옆자리니까 챙겨주는 거라며 생색내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구내식당 밥이 질려서 다른 음식이 먹고 싶었지만, 윤의 첫 출근을 배려하는 건 선배의 몫이라고 여긴 것이었다. 지현과 윤은 지하 1층으로 가 배식을 받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 처음 본 윤과 마주 앉아 먹는 밥이지만 지현은 어색하지 않았다. 윤이 주는 편안함에 지현은 수다쟁이가 되어버렸다.
“밥 먹고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 마실래요?”
“좋죠. 커피 좋아해요. 제가 살게요.”
“아, 아니에요. 첫날이니 제가 살게요. 다음에 사주세요.”
밥을 다 먹고 윤과 지현은 1층 카페로 향했다. 지현은 윤에게 어떤 커피를 마실 거냐고 물었고, 윤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골랐다. 지현도 커피는 아메리카노만 마시는데 혹시 윤도 그런지 궁금했다. 윤과 지현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받아 들고 카페 뒤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걸었다. 지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저는 사계절 내내 커피는 아메리카노만 마셔요.”
“엇, 저도요. 원두 본연의 맛을 음미하는 게 좋아서 아메리카노만 마시거든요.”
문득 지현은 커피뿐 아니라 다른 취향도 잘 맞을 것 같았다.
“퇴근하면 뭐 하고 지내세요? 취미 같은 거요.”
“책 읽는 거 좋아해서 주로 책 읽어요. 몇 년 전부터 시집을 자주 읽고 있어요.”
시집을 좋아한다니. 시를 쓰는 취미를 가진 지현은 반가운 마음에 신이 나서 “어쩜 이렇게 잘 맞을 수 있을까요? 저도 시 좋아해요.”하고 말했다. 방정맞게 말한 듯해 뻘쭘해진 지현은 시선을 돌리며 빨대로 얼음을 휘저었다. 지현과 윤은 시 이야기로 산책하는 동안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지현은 윤을 보며 하나의 단어를 떠올렸다. 윤을 처음 보았던 느낌 그대로인 단어, Destiny! 여러 개의 문장이 떠올라한 편의 시를 짓고 싶었다.
지현은 자리에 앉자마자 업무를 미뤄두고 한글 파일을 열었다. 시가 왔으니 10분이면 한 편의 시를 완성할 수 있을 터였다.
Destiny
blackswan
현실과 비현실의 문을 열고
그가 걸어 들어왔다
꿈일까,
익숙함과 친근함을 양손에 든
그에게, 우리가 언제 만났었는지 물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마주 앉았다
눈, 코, 입, 귀,
모든 걸 음미했다
끊이지 않는 대화와 웃음이 사이로
꿈에 보았던 그가 서 있었다
지현은 시를 완성하고 바로 sns에 업로드했다. 블랙스완이라는 닉네임으로 자작시를 올리는 시 계정이었다. 시인은 아니지만 지현에게 시는 지친 일상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다. 지현의 시를 좋아해 주는 세 명의 독자도 있다. 이 중 가장 오래된 독자는 삼 년 전부터 지현이 시를 올리면 댓글로 감상을 꾸준히 달아주고 있다. 한 번의 공감과 한 줄의 댓글은 지현이 시를 계속 쓸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시를 올린 지 30분이 지나자, 댓글이 달렸다는 알람이 떴다. 가장 오래된 독자였다. 역시 푸딩님!
➥ 운명적인 만남을 믿으시나요? 저는 믿어요. 블랙스완님께서 운명적인 누군가를 만난 셨을까요? 그분도 블랙스완님이 느끼신 것처럼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하시길 바라요 :)
➥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참 신기한 경험이에요. 처음 보는데 원래 알던 사람인 것 같았어요. 이런 경험이 처음이어서 시를 쓰고 싶었어요. 늘 저의 시를 읽어주시고 감상을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시간은 느리게 가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눈 보면 깜짝할 사이에 가버리고 만다. 벌써 한 달이 지났다니. 이제 윤과 작별해야 한다. 윤이 영진 사업장으로 돌아가기 전날 쫑파티 겸 회식을 하기로 했다. 지현은 윤과 술잔을 기울이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 달이 너무 빨리 지나갔어요. 덕분에 즐거웠어요. 돌아가더라도 연락하고 지내요.”
윤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말수가 적었는데 술을 마셔서인지 이날 따라 말이 많았다. 사적인 이야기는 도통하지 않던 그였는데 웬일인지 사담을 늘어놓았다. 지현은 마음을 열게 해주는 알코올의 힘을 실감하며 피식 웃었다.
“제가 책을 좋아해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1학년 쓰기 시작한 일기를 아직도 쓰고 있어요. 일기장만 해도 수십 권이에요. 하하.”
윤은 비어 있는 술잔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파견근무가 처음이라 적응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다들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짧은 한 달이었지만, 추억을 많이 남겼어요. 상처받는 게 싫어서 저도 모르게 자기 방어적인 태도가 나와요. 그래서 마음을 잘 못 여는 편인데 한 달 사이에 누군가와 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새롭게 알았어요.”
팀장은 훈훈한 분위기를 잘 마무리 짓기 위해 한마디 덧붙였다.
“자네가 일을 참 잘해주었네. 팀원들 손발을 척척 맞춰주는데 어디 흠잡을 데가 있나. 고맙네.”
과장 김현영은 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립박수를 치며 “역시 우리 팀장님이셔. 따봉!”하고 말했다. 지현은 회식이 끝나면 윤과 따로 이야기를 좀 더 나누고 싶었지만 3차까지 회식이 이어져서 그럴 수 없었다. 지현이 택시를 잡으려고 서 있는데 윤이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집에 가서 읽어보세요. 꼭이요. 그동안 감사했어요.”
곧 택시가 도착했다. 지현은 택시에 올라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잘 들어가요.”
쪽지에 적힌 내용이 궁금해 읽어보려다 윤이 집에 가서 읽으라고 했던 게 기억나 손에 꼭 쥔 채 꾹 참았다. 집에 도착해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쪽지를 펼쳤다. 쪽지에는 시 한 편이 적혀 있었다. Destiny, 지현이 지은 시였다. 그제야 지현은 윤에게 왜 친근함이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전생을 믿는 사람은 느낄 수 있는 촉이 발달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윤은 전생의 나와 이어졌던 인연이었을지 모른다고 지현은 생각했다. 지현은 컴퓨터 앞에 앉아 <전생이 있다면>이라는 제목으로 시 한 편을 써서 sns에 올렸다. 5분도 되지 않아 독자 푸딩이 댓글로 감상평을 전했다. 푸딩님의 댓글에서 윤에게 느꼈던 익숙하고 친근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