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
-미키 기요시의 <독서와 인생>을 읽고
미키 기요시(三木淸:1897~1945)는 휴머니즘을 표방한 철학자 이자 전쟁과 독재로 치닫던 일본 정부에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옥사한 혁명적 사상가이다.
그는 교토京都대학 철학과에서 개교 이래 최고의 수재라는 평을 받으며 처음으로 독자적인 일본 철학의 체계를 세운 니시다 기타로西田畿多郞를 사사하고 1922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1925년까지 H, 리케르트와 하이데거 등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후 그를 사로잡은 실존철학實存哲學은 그의 평생의 철학적 연구 주제가 된다.
귀국 후 도쿄의 호세이法政대학 교수로 부임한 이후 마르크스주의의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미키 기요시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합하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일본 공산주의자 모임에서 축출되지만 그런데도 1930년에 공산당의 동조자라는 죄목으로 체포되고 강단에서도 쫓겨났다. 그 후 미키 기요시는 <요미우리 신문>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진보적이고 예리한 비판과 풍자의 글로 일본 군국주의에 저항했다.
다시 대학으로 돌아온 미키 기요시는 일본의 군사력 증강에 반대했지만, 육군에 징집되어 1년간 필리핀에서 복무하게 된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침묵했다. 그러나 1945년 3월 28일, 그는 경시청에서 탈주한 친구에게 밥 한 그릇과 옷 한 벌을 주었다는 이유로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도요타마豊多摩 감옥에 수감되었고, 전쟁 종결 후인 9월 26일 이곳에서 영양실조와 피부병, 급성 신장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키 기요시의 <독서와 인생>은 1942년 6월에 출간되었다. 이 책은 오늘날 독자의 마음을 끄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독서와 관련된 미키 기요시의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이 고전적인 규격을 갖춘 문장과 함께 깊은 감명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에서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할까>는 거의 완벽한 독서 지도의 규칙을 제시하고 있다. 미키 기요시가 말하는 독서의 방법은 곧 인생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
미키 기요시의 사색 및 인생과 관련된 이런 독서 방법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그의 독서론이 사상과 인생의 편력과 통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할까>
1. 우선 먼저 중요한 것은 독서 습관을 붙이는 일이다.
독서의 습관을 기르려면 여가 시간을 찾아내려고 애써야 한다. 그리고 인생에서 여가 시간을 찾아내려고만 하면 어디에나 다 있다. 독서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독서하지 않으려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혼자서 독서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아니, 동서고금의 모든 훌륭한 사람들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 독서의 큰 기쁨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서를 원하는 사람은 여가 시간을 찾아내는 데 현명해야 하는 동시에, 규칙적으로 독서하는 것을 잊어서도 안 된다. 날마다 예외 없이 일정한 시간에, 설사 30분이라도 독서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독서 습관은 독서를 위한 여가 시간을 만들어 낸다. 독서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독서 습관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독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독서하기에 좋은 형편이 되었을 때 독서하려고 하면 끝내 독서하지 못할 것이다. 일단 독서를 하기 시작하면 들뜬 마음도 가라앉고 근심도 잊어버리고 불운도 개의치 않게 되어 모든 것이 다 독서하기에 좋은 상태가 될 것이다. 독서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준다.
2. 독서는 일종의 기술이다.
모든 기술에는 일반적인 규칙이 있으므로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기술에서는 일반적인 이론이 주체화되어야 하고, 주체화된다는 것은 개별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기술을 몸에 익히는 것이고, 몸에 익히지 않은 기술은 의의가 없을 것이다. 각자의 기질을 떠나서는 독서의 기술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해도 좋은 정도이다. 독서법은 각자에게 있어 성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각기 자신에게 적합한 독서법을 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기 기질에 적합한 독서법을 스스로 발명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오래, 즐겁게, 또 유익하게 독서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독서법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우선 많이 읽어야 한다. 다독(多讀)은 남독*(濫讀)과 같지 않지만, 남독은 분명히 다독의 하나이고, 그리고 다독은 남독에서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다. 예로부터 독서법에 대해 쓴 사람은 거의 모두 남독을 경계하고 있다. 많은 책을 함부로 읽지 말고 한 권의 책을 되풀이해 읽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독서에 있어서의 남독도 동일한 관계에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남독의 위험을 통해 자신의 기질에 맞는 독서법에 도달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정독하라고 하지만 특히 자신에게 필요한 한 권의 책이 과연 무엇인가는 많이 읽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지 않은가. 독서는 먼저 남독에서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다. 참된 독서가는 거의 모두 남독에서 시작하고 있지만 남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참된 독서가가 될 수 없다. 남독은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남독일 때 의미가 있다.
속담에 현자는 단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말이 있다.
독서에서 일반적인 교양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독서가란 일반적인 교양을 위해 책을 읽는 사람을 말한다. 단지 자신의 전문 분야와 관련해서만 독서하는 사람은 독서가라고 할 수 없다. 교양이란 어떤 전문 지식을 지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교양은 언제나 일반적인 지식을 의미하고 있다. 전문가가 되기 위해 독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사람은 특히 일반적인 교양을 위해 독서해야 한다.
전문가가 자신의 전문 분야 이외의 책에서 자기의 전문 분야에 유익한 여러 가지 시사점을 얻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다독은 남독의 의미에서는 피해야 하지만 박독*(博讀)의 의미에서는 필요하다. 남독과 박독이 구별되는 한 가지 중요한 기준은 그 사람에게 전문 분야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아무 방향도, 아무 목적도 없는 박독은 바로 남독이다. 일반적인 독서의 경우에도 사람은 어떤 전문 분야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일반적인 교양도 전문 분야에 의해 살아나게 되며, 전문 분야가 없는 일반적인 교양은 딜레탕티즘*(도락)에 다름 아니다.
어떤 목적이 있어야만 독서하는 것은 공리(功利) 주의이고, 이런 공리주의는 독서에 해롭다. 목적이 없는 독서, 이를테면 독서를 위한 독서도 중요하다. 이것에 의해 사람은 일반적인 교양에 이를 수 있다. 젊었을 때부터 닥치는 대로 읽은 것이 결과적으로 일반적인 교양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인 교양은 목적이 없는 독서의 결과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읽는 것이 몸에 배어 참된 교양이 되려면 다른 한편으로 전문적인 독서가 필요하다. 전문 분야가 없는 독서는 중심이 없는 독서이고 아무리 많이 읽어도 아무것도 읽지 않은 것과 같은 결과가 된다. 이런바 독서가가 빠지기 쉬운 폐습은 딜레탕티즘이다.
3.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사람은 모든 책을 같은 방식으로 읽을 수 없고 또 같은 방식으로 읽어서도 안 된다. 폭넓게 읽으려면 책의 종류에 따라 읽는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여기에 독서의 기술이 있다. 사람은 단지 좋은 책을 읽음으로써만 좋은 책과 나쁜 책을 분간하는 눈을 기를 수 있고 그 역(逆)은 아니다. 좋은 책이라고 해서 반드시 읽기 쉽지는 않다. 읽기 쉬운 책, 독자에게 아부하는 책만 읽으면 참된 지식도 교양도 얻을 수 없다. 한 번에 그 책을 전부 다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 아무튼 좋은 책에 부딪혀 보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한 번에 그 책을 이해할 수 없으면 얼마간 간격을 두었다가 다시 읽는 것이 좋다.
물론 어려운 책, 큰 책이 언제나 좋은 책이라는 식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현학적*(衒學的)인 사람이 빠지는 오해이다. 좋은 책은 어떤 것이든 본질적으로 말해 가장 이해하기 쉬운 책일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쉽게 읽어 나갈 수 있는 책 중에도 좋은 책이 많이 있다. 그리고 독서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계통적으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 독서도 무질서해서는 효과가 없으므로 순서를 밟아 가며 읽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것이 좋은 책이냐 하면 물론 고전이라 불리는 책이다. 고전은 역사의 시련을 거치며 살아남은 것으로 이미 가치가 정해진 책이다. 고전은 결코 낡아 못 쓰게 되는 일이 없이 언제나 새롭고 싱싱한 면을 지니고 있다. 고전을 읽음으로써 사람은 좋은 책과 나쁜 책을 분별하는 감식안을 기를 수 있다. 고전을 사랑하지 않는 참된 독서가는 없고, 고전에 대한 교양이 없는 참된 교양인도 없다. 고전은 언제나 안심하고 읽을 수 있고 되풀이해 읽어도 언제나 새로운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종종 고전이라고 할 정도는 못 되어도 이미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읽히고 있는 책을 읽도록 하고 신간을 곧 손에 들어서는 안된다고 충고하고 있다. 독서에서 상고주의*(尙古主義)에도 또한 한계가 있다. 저널리즘이 아카데미즘에 대해 독자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듯이 신간을 읽는 데에도 그 자체로서의 의의가 있다. 모든 과거가 되살아나고 전통이 소생되는 것은 현재로부터이다. 고전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물론 나쁜 일이지만 신간을 두려워하는 것도 옳지 않다. 고전은 안심하고 읽을 수 있는 책인 데 반해, 신간을 읽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다. 그러나 독서에서도 모험을 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다. 고전을 편애하고 신간을 혐오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독서가 단지 취미로 흐르는 경향이 있고 딜레탕티즘에 빠지기 쉽다.
독서에도 나이가 있어 노인은 고전적인 책을 좋아하고 청년은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보통이다. 고전 때문에 신간을 경멸하지 않고 신간 때문에 고전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고전을 읽는 것이 중요하듯이 사람은 또한 원전(原典)을 읽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해설서나 참고서를 읽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원전을 중심으로 그것에 의존해야 한다. 원전은 언제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책이다. 예컨대 플라톤이나 칸트와 관련해 천 가지의 문헌을 읽어도 원전을 읽지 않으면, 그것을 되풀이해 읽지 않으면 깊이 근본적으로 배울 수 없다. 제삼자가 쓴 해설서보다 원전이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한층 더 이해하기 쉽다. 많은 참고서를 읽는 것보다 한 권의 원전을 되풀이해 읽는 것이 결국 그것을 파악하는 지름길이다.
원전은 종종 해설서보다 짧다는 이점이 있다. 원전을 읽는 것은 독서를 단순화하는 데 필요한 방법이다. 책이 남이 읽어 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읽어야 하는 것이라면, 이 스스로 읽을 필요성이 원전의 경우에는 절대적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문학상의 작품조차 스스로 읽지 않고 남이 쓴 해설이나 비평만 읽는 사람이 적지 않다. 사람은 언제나 원천(源泉)에서 퍼 올려야 한다. 원천은 언제나 새롭고 풍부하다. 원전을 읽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견해를 가장 많이 얻을 수 있다. 원서가 지니고 있는 미묘한 맛과 섬세한 감각은 번역에 의해 전달될 수 없다. 번역서로 읽는 것이 원서로 읽는 것보다 빠르기는 하지만 천천히 읽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 생각하면서 읽는 여유를 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중요한 일이다.
원서를 읽으려면 어학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 어학력이라는 것도 결코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학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교양이다. 하나의 국어는 그 민족정신의 표현이고 그 사상의 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책을 원어로 읽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또 어느 경우에나 원어로 읽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책은 가능한 원서로 읽도록 해야 한다.
고전이라 불리는 것은 좋은 책임이 틀림없지만 그 고전도 숫자가 많아 선택이 필요하고, 특히 신간의 경우에는 선택하기가 더욱더 어렵다. 각기 자신에게 적합한 독서법을 찾아내야 하듯이 자신에게 맞는 책을 찾아내려고 애써야 한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자신을 고양시켜 주는 책을 읽어야 한다. 독서에서 사람은 무엇보다 특히 고전 속에서 자기에게 적합한 것을 찾아내려고 애써야 한다. 그것에 의해 자신의 사상이라는 것도 만들어지고 애독서라 불리는 것도 정해진다. 애독서가 없는 사람은 사상적으로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좋은 책을 읽는 것과 더불어 올바로 읽는 것도 중요하다.
올바로 읽지 않으면 좋은 책의 가치도 모르게 될 것이다. 올바로 읽는 것은 무엇보다 스스로 읽는 것이다. 올바로 읽으려면 먼저 그 책을 스스로 소유해야 한다. 사람은 빌린 책이나 도서관 책에서는 근본적인 것을 조금도 배울 수 없다. 일반적인 교양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나 전문서라도 기초적인 것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 좋다.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와 관련해서는 사람은 책에 대한 어떤 감각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한 권의 책을 보았을 때 독서가도 뭔가 '특수한 가치'를 느끼는 감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독서에서 진실로 발견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 게다가 책에 대한 이 감각은 책을 가까이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올바로 읽기 위해서는 천천히 읽어야 한다. 결코 급히 서둘러서는 안 된다. 그 책에서 배우기 위해서도, 그 책을 즐기기 위해서도 천천히 읽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직접 책을 베껴 읽은 옛사람들에게는 천천히 읽는 좋은 습관이 있었다. 모든 책을 다 천천히 읽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책은 오히려 대충 훑어보는 것이 좋고, 또 어떤 책은 그 서문만 읽어도 되며, 다른 어떤 책은 그 존재를 알고 있기만 해도 충분하다. 모든 책을 같은 방식으로 읽으려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책을 그저 대충 훑어보거나 여기저기 골라 읽거나 해서는 근본적인 지식이나 교양을 얻을 수 없다. 배워 익혀 제 것으로 만들려는 책은 천천히, 어디까지나 천천히,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 도중에 마음이 변하는 것은 좋지 않다. 끝까지 읽음으로써 처음에 씌어 있던 것의 의미도 진실로 이해할 수 있다.
천천히 읽는 것은 그 참된 의미에서는 되풀이해 읽는 것이다. 꼭 읽어야 하는 책은 되풀이해 읽어야 한다. 되풀이해 읽는 것은 노인의 취미라고 할 것이다. 노인은 신간을 좋아하지 않고 옛날에 읽은 책을 되풀이해 읽기를 좋아하는 것이 보통이다. 되풀이해 읽는 것은 우선 잘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다. 좌우를 비교하고 앞뒤를 관련시킴으로써 잘 이해할 수 있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알고 있어야 하고, 모든 부분이 전체와 관련지어져 전체적으로 이해되어야 비로소 진실로 이해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되풀이해 읽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우리는 반드시 언제나 되풀이해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읽어보고 결국 알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두고 얼마간 시일이 경과되어 자기의 지식이나 사색이 깊어졌을 때 다시 꺼내어 읽는 것이 좋다. 전에 읽은 적이 있는 책을 되풀이해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되풀이해 읽는 즐거움은 그 책과 친구가 되는 데 있다. 천천히 읽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처음부터 천천히 읽어야 하는 것은 고전과 같이 가치가 정해진 책이며, 신간을 손에 넣었을 때는 오히려 처음에는 빨리 읽어 그 내용을 대략 파악하고 다시 되풀이해 이번에는 천천히 읽는 것도 좋다. 천천히 읽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되풀이해 읽는 것이다.
되풀이해 읽는 것은 세세한 부분을 음미하기 위해 필요하다. 한 권의 책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목적밖에 없다면 천천히 읽을 필요가 없다. 특히 고전적인 책에는 언뜻 보아 쓸데없이 보이는 대목이 있게 마련이다. 쓸모없는 것이 전혀 없는 듯한 책은 좋은 책이 아니다. 언뜻 보아 쓸모없이 생각되는 부분에서 사람은 뜻밖의 진리를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옛사람들은 아주 천천히 자연스럽게 썼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의 책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천천히, 그리고 되풀이해 세세한 부분에 걸쳐 음미하면서 읽어야 한다.
되풀이해 읽는 것은 독서에서 발견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특히 요구된다. 이처럼 발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독서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자기 생각에 따라 제멋대로 읽는 것은 읽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거기에서 뭔가 배우려는 태도로 책을 대해야 한다. 이해가 비평의 전제로서 필요하다. 발견적인 태도로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발견적인 태도로 읽으려면 스스로 뭔가 문제를 갖고 책을 대해야 한다. 그리고 독서에 임해서도 스스로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 그 경우 독서는 저자와 자신 사이의 대화가 된다. 이 대화 속에서 독서의 참된 즐거움을 찾아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저자가 대신 생각해 주길 바라며 독서하는 것은 좋지 않다. 물론 스스로 무엇이든 생각할 수 있다면 독서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독서는 사색을 위한 것이라야 한다. 아니, 오히려 독서 자체에 사색이 결부되어야 한다. 책을 다 믿으면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고 옛사람도 말했다. 비평적으로 읽는 것은 스스로 사색하면서 읽는 것이고, 스스로 사색하면서 읽는 것은 단지 비판적으로 읽는 데 그치지 않고 발견적으로 읽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발견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했듯이 자기 자신의 독서법이 몸에 배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독서법 자체도 스스로 얻으려는 것을 갖고 독서할 때 저절로 발견된다.
나는 어떻게 책을 읽고 있는가.
미키 기요시의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할까>를 읽으며 그의 독서 방법이 마음속 깊이 와닿았다.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독서의 즐거움에 빠져 들었다. 어린 시절 <일본 소년>을 처음 접하고 이상하게 인상에 깊이 남았다고 했다. 그 무렵 아이들에게 널리 읽었던 이야와 사자나미嚴谷小波의 동화를 처음 접하고 마음속 꿈을 길러 주었다.
나 역시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학원>이라는 학생 교양 잡지를 구경했으나 그림의 떡이었다. 그 시절 가난하여 그런 책을 감히 사 볼 수는 없었다. 겨우 읽어본 것이라고는 교과서에 실린 수필이나 산문 단편 소설 몇 편 정도였다. 특별히 읽은 작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고교 시절에는 새로 부임한 국어 선생님에게 매료되어 가슴속 깊이 문학에 침잠했다. 그 시절 민태원의 <청춘 예찬>은 지금도 내 가슴을 고동치게 한 기억이 또렷이 남아있다. 하지만 문학에의 꿈은 컸지만 깊이 독서할 수 있는 처지는 되지 못하였다.
그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간혹 서점에 들러 책을 사 보기도 하였지만 체계적인 독서는 하지 못하고 베스트셀러나 스타디셀러 정도만 골라서 읽었다. 결혼하고부터 신문을 구독했는데 연재소설을 스크랩을 해서 읽었을 정도였다. 지금도 생각나는 작가는 박경리 최인호 등 소설가와 법정 스님의 산문과 성철스님의 법어문 등이 기억난다. 신문 연재소설인 최인호의 <잃어버린 왕국> <길 없는 길> 등 신문 스크랩 철은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나 박경리의 <토지> 등은 밤을 새워가며 읽은 기억이 난다.
이 밖에도 김형석 이병주 윤흥길 이문구 김주영 나혜석 전혜린 박완서 등의 작품들도 즐겨 읽었다. 하지만 논어 대학 중용 고문진보나, 일리아스 호메르스 플라톤 니체 칸트 등과 같은 고전은 가지고 있었지만 깊이 빠져들지는 못하였다.
나의 본격적인 독서 편력과 책 수집 버릇은 은퇴 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주로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책만 보면 사들였다. 동서양의 고전은 물론이요 소설 산문 할 것 없이 사들이며 남독濫讀을 했다. 어떤 책은 작가가 좋아서 사고, 책이 예뻐서도 사고, 또 어떤 책은 오래된 고서라서 사기도 했다. 그야말로 책 중독자가 되었다. 이렇게 사들이기만 하고 미처 다 읽지 못하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나의 책에 대한 편견은 독서 편력으로 이어져 이 책 저 책 마구잡이씩이 되었다. 천천히 되풀이해 읽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애독서를 미처 가질 수도 없었다. 하지만 새로 산 책은 그 이튿날 새벽에 맑은 정신으로 서문과 목차 정도라도 읽으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
이제부터라도 책을 좀 더 천천히 되풀이해가며 제대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사색을 통하여 폭넓게 박독博讀을 하고 싶다. 그리하여 나의 애독서를 정하여 머리맡에 두고 하나하나 더욱 음미하면서 읽을 줄 아는 미키 기요시 같은 독서가가 되고 싶다. 그리고 나의 글 속에 그 뜻이 풍겨 나올 수 있도록 정진해 갈 것이다. ( 2025. 01. 24)
*남독 : 책의 내용이나 수준 따위를 가리지 아니하고 아무 책이나 마구 읽다.
*박독 : 문학이나 음악 미술 등 여러 분야를 폭넓게 읽음.
*딜레탕티즘 : 취미 본위의 학문이나 예술, 도락.
*현학적 : 학식이 있음을 자랑함.
*상고주의 : 옛날 문물이나 사상, 제도를 귀하게 여겨 모범으로 삼는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