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2, 잘 변해야지

Burgos에서 Honillos de Camino까지

by Sal

지금까지 까미노길에서 몇 명의 한국인 연장자분들을 만났다. 연세는 60~70대 정도로 보인다. 별명을 한번 지어보았다. 라임을 맞추어서 1번은 투덜이, 2번은 스마티(Smarty), 3번은 주책이.



투덜이님이 하는 이야기는 우린 재미도 없고 관심도 없는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본인의 이야기를 꺼낸다. 작은 알베르게의 주방에서 같이 요리를 하게 되었을 때 처음 만났는데, 따로 먹기도 머쓱해서 같이 저녁식사를 한번 했다. 그 후부터는 슈퍼에 갈 때도 같이 가자고 하고, 둘이 와인 한잔 마실 때에도 슬쩍 끼어서 정치, 경제, 사회에 걸쳐 다양하지만 나는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힘들게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해서 씻고 빨래하고 맥주 한잔하면서 햇빛 또는 그늘아래서 조용히 눈앞의 풍경을 즐기려고 하면 뒤쪽에서 스윽 나타나서 그 소중한 시간을 야금야금…. 정말 조용히 있고 싶은데…. 그것도 그다지 즐겁지 않은 이야기를 마구 쏟아낸다. 같은 도미토리의 어떤 분이 코를 너무 많이 골아서 잠을 못 잤다. 어느 식당은 음식을 많이 줘서 배가 너무 부르다. 얼마 전부터는 발에 물집이 생겼다고 우리에게 와서 아프다고, 힘들다고 하신다. 참 안되셨다. 아프겠다. 하지만 어쩌라고. 까미노길 걸으면 다 아픈데, 다 물집 생기는데….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하시는 2번 스마티님은 알베르게에서 아침을 먹고 나갈 준비를 하는데, 불쑥 우리 앞에 나타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스윽 나타나더니 자판기 사용법을 물어본다. 우리도 그 자판기를 사용해 본 적이 없기에 자판기 앞에 써있는 영어 설명을 읽고 있는데 돌연 사라졌다. 그새 우리는 버려두고 다른 외국인에게 가서 물어본다. 우리가 본인보다는 어린 한국사람으로 보여서 아마도 ‘음… 저… 잠시… 실례…’ 등등의 시작 추임새와 ‘아… 네… 그럼 저기에서 다시 물어볼게요… 감사해요…’ 등등의 마무리는 그냥 생략하셨나 보다.


잠시 밖에 나가는데, 스마티님이 알베르게 출구 로비에서 직원과 얘기 중이다. 옆에는 브라질의 우고와 홀란드 출신 피터 아저씨도 같이 서 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우고는 몸이 안 좋아서 하루 더 묵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고, 스마티님도 본인 짐을 잠시 맡겨 두고 싶은데 안된다고 해서 불만이라고 하신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직원은 일단 오전 8시 체크아웃을 하면 오후 1시에 체크인 시간까지는 알베르게에 사람이 없으니 그 이후에 와서 찾아가라고 설명을 하는데, 이 부분이 잘 전달이 안된 모양이다. 스마티님은 구글번역기로 본인 요청은 이미 다 설명하셨다고 하는데 직원의 설명은 잘 이해하지 못하신 모양이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막 씻고 나오는데 호스피탈레라가 갑자기 나에게 오더니 좀 도와달라고 한다. 무슨 일이지 궁금해하면서 가보니 또 스마티님이다. 본인의 동키 [1] 짐을 이 알베르게로 보냈는데 아직 도착을 안 했다고 한다. 무슨 일이지 물으니, 설명은 뒷전이고 자신은 이미 스마트폰 번역기로 호스피탈레라에게 설명했다고 한다. 호스피탈레라 왈, 일단 짐은 여기로 오지 않았으니 이 지역의 다른 알베르게에 잘못 도착했는지를 먼저 확인해 보고 만약 다른 곳에도 없으면 동키 서비스 회사에 전화를 하라고 한다. 그리고 통화가 어려우면 전화 통화는 본인이 도와주겠다고 한다. 나에게 이 말을 스마티님에게 좀 전달해달라고 한다. 구글 번역기는 사람이 하고자 하는 말은 잘 전달할 수 있지만 상대방이 하는 말을 잘 이해할 정도로 스마트하지는 못한 것 같다. 알베르게 직원의 말을 전해주었더니 스마티님은 사라진 짐이 많이 걱정이 되었는지 인사도 없이 또 슈슈슉 사라지셨다.


3번 주책이님은 부르고스 알베르게에 도착한 후, 좁은 이층침대에 앉아 짐을 막 풀고 있는데 불쑥 얼굴을 들이밀면서 한국말로 인사를 하신다. ‘아 네네’ 우리 자리가 제일 구석이었는데, 침대마다 돌아다니면서 한국 사람 같으면 그냥 인사를 하시는 모양이다. 슈퍼에 가려고 알베르게 1층에서 잠시 만났을 때는 이 동네 맛집 소개시켜주신다고…. ‘아 네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날 아침 침대에서 막 일어났는데, 세수도 하기 전에 서로 보이기 부끄러운 얼굴인데, 굳이 우리 침대까지 오셔서 또 인사. 몇 시에 출발하냐고? ‘아직 잘 모르겠는데요? 네네네’ 쑥스러워서 그러셨겠지…. 우리도 쑥스러우니까.


습관은 우리 뇌가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한 수단 중의 하나라고 한다. 습관대로 하면 현재의 상황을 매번 처음부터 판단 분석하지 않고 머릿속에 이미 정리해 놓은 패턴대로 그냥 하면 되니까, 에너지를 아끼면서 머리는 그냥 명령만 내리면 된다고 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그때그때 상황에 따른 판단보다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해온 많은 습관들에 의해 행동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진다고 한다. 그런데 비행기 16시간만 타면 그 상황이 매우 매우 많이 바뀌는 외국에서는 기존에 이미 계산해 놓은, 이미 검증받은 행동 패턴들이 상황에 잘 맞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 뇌가 좀 많이 피곤해질 수는 있겠지만, 그리고 순례길 걷느라 몸도 피곤한데 뇌 에너지까지 사용하려면 더더욱 피곤하겠지만, 또 분석하느라 그 상황에 따른 나의 반응이 더 느려질 수 있겠지만, 나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다시 판단하고 움직이도록 노력해야겠다. 어차피 나는 좀 느리니까.



[1] 동키서비스는 노약자의 순례길을 위해 배낭을 메고 걷기 힘든 사람을 대신해서 약간의 비용을 받고 차로 배낭을 배달해 주는 순례길 서비스이다. 출발 전 아침에 배낭을 어느 마을 어느 알베르게로 배달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비용을 봉투에 담아 놓으면 그 장소로 배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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