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franca에서 O Cebreiro까지
오늘은 28.4km의 제법 긴 구간인데, 마지막 7km 정도가 상당한 오르막길이다. 프렌치루트에서 가장 힘든 구간 중에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오세브로이, 오세레브로, 오세브레이오, 오세브레이로” 다음 중 맞는 발음은? 왜 이 지명은 발음이 잘 안 되고 항상 혀가 꼬이는지 모르겠다.
두 시간 정도 걸으니, 또 그분이 오신다, 오른쪽 발목이 아파온다. 걷다 보니 한국아저씨 한 명과 대만의 마이크와 동행이 되어 걷게 되었다. 난 발목이 아프니 온 신경이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아프지 않게 걸을 수 있을까 하는 데에만 쏠려 있는데, 이 두 분은 오늘따라 대화에 굶주렸는지 걸으면서 계속 말을 걸어온다. 이분들에게 당시 내 대화 내용이 성의가 없었다면 양해를 바라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오늘부터는 까미노길의 마지막 지역인 갈리시아(Galicia)지역이다. 밤(Castana)과 문어(Pulpo) 요리가 유명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유명한 것은 안중에도 없고 나는 오늘 이 통증을 끝까지 참고 오늘의 목적지까지 갈 것인지 아니면 도중에 멈출지 심각한 내적 갈등만 하면서 걷고 있다. 그런데 저 무심한 냉혈한 스파이 A는 나를 걱정하는 척하면서도 내심 계획한 대로 오늘의 목적지까지 가기를 바라는 눈치다. A는 뭐든지 일단 계획하면 단무지 ‘단순 무식 Just do it!’이다. 아마 드라마에서라면 이런 장면에서는 ‘나쁜 지지배!’라고 한 마디 할 것 같다.
나중에 돌아와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A는 나에게 약하게 대하면 자기도 약해질 까봐 모른 체하고 그냥 마구 걸었다고 한다. 정말로 그랬는지 아니면 자기도 양심이 있어서 지금 이렇게 둘러대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발걸음을 뗄 때마다 오는 이 거시기를 꾹꾹 눌러 참고 내가 살아오면서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수십 년째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점심까지도 패스하고 그저 천천히 묵묵히 한 발 한 발 옮기는 중이다. 한발 옮기고 ‘아으아이… x$j6*&)^’ 한마디 하고, 또 한발 옮기고, 또 ‘아으으으 이론 f&%#%H’, 또 한발…. 물론 모두 마음속으로이다.
요즘은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병? 이 되어버린 ‘후천적 의사결정장애’로 인해 결국 멈추지 못하고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오늘의 마지막 오르막길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 산속의 오르막길은 길에 밤송이들이 몇 개 떨어져 있다기보다는 아예 길 전체가 밤송이들로 덮여 있다. 처음에는 땅에 떨어진 밤들이 아깝기도 하고 이런 광경이 신기해서 몇 개 줍기도 했지만, 밤을 줍다 보니 다리 아픈 것은 잠시 잊을 수 잊지만 걸음속도가 너무 느려진다. 애써서 외면하고 걷다가도 초록색 밤송이 사이로 뺀질뺀질 윤기 나는 갈색을 살짝 내보이면서 애처로이 ‘나 좀 데려가주세요’ 하는 밤송이들을 보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한걸음 걷고 밤 하나 줍고 고개를 들면, 바로 그 앞에 또 다른 아이가 기다리고 있다. 또 한 걸음 걷고, 밤 두 개 줍고 이렇게 가다 보니, 발목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이 높은 오르막 길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솔직히 전혀 모른 것은 아니었다.) 넘고 오늘의 목적지 4km 전의 마지막 마을 라 파바(La Faba)에 도착했다. 허리 한번 펴고, 잠시 알밤 생각에서 벗어나니 또 발목 통증이 한층 강화된 세기로 다시 온다. 이런 거시기 같으니라고….
아무튼 수비리에서 1/4배속으로 걸었던 이후에 가장 느린 속도로 걷는 바람에 알베르게에 아주 늦게 도착했다. 오른쪽 발목은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아프고, 온몸은 내린 비에 다 젖었고, 어제 미처 말리지 못했던 옷들까지 축축하다. 침대를 배정받고 도미토리의 우리 자리에 도착해서 드디어 무거운 배낭을 내리려는 순간, 우리 침대에 다른 짐들이 놓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엥?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침대번호를 한 번 두 번 재확인을 해도 우리는 틀리지 않았다. 상황을 파악해 보니 먼저 온 누군가가 자기가 배정받은 침대로 가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내 번호의 침대에 먼저 짐을 내려놓고 다른 곳으로 가버린 것이다. 이런 똥매너 순례자 같으니라고! 아프고 힘들고 지치고 축축한 상태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더러운 매너와 마주치니 화는 나지만 화를 낼 체력이나 정신력도 없다. 무엇보다도 그 화풀이 대상을 찾을 길이 없다. 리셉션에 문의하니 그냥 다른 침대를 배정해 준다. 다시 배낭을 끌고 그 번호의 침대로 가니 헐~ 또 다른 누군가가 차지했다. 이번에는 호스피탈레라까지 와서 직접 확인했지만 이미 짐만 두고 사람은 사라졌으니 그 똥매너 인간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따질 수도 없고, 주인도 없는데 짐을 치우고 내가 차지할 수도 없고 어찌할 수가 없다. 이런 으 아아아아아!
이건 마치 배가 아주 많이 아파서 주변 화장실을 찾다가 마침내 발견한 화장실을 발견하고 마지막에 실수하지 않으려고 배에 끝까지 힘을 주고 조심조심해서 걸어가는데, 화장실 문을 열려는 순간에 안에는 아무도 없지만 문은 무언가에 걸려서 문이 열리지 않는 상황이다. 점점 아랫배의 통증은 최고조로 올라오고 식은땀이 나고 다리는 후덜덜한 상태와 비슷하다. 아픈 발목을 참고 무리해서 오늘의 목적지까지 왔는데, 한시라도 빨리 앉아서 쉬고 싶은데 이런 정체 모를 XXX똥매너 인간들 덕분에 이리저리 침대 사이를 떠돌고 있으니 정말 왕짜증이 난다.
결국 출입문 바로 옆의 침대에 다시 자리를 배정받았다. 한 50여 개의 침대가 한방에 꾸역꾸역 들어가 있으니 오늘처럼 모든 것이 축축하게 절여진 날에는 50인분의 냄새가 더욱더 시너지를 발휘할 것 같다. 그래서 안쪽보다는 차라리 조금이라도 환기가 잘 될 것 같은 문 옆의 자리가 낫다고 스스로 자족하면서 오늘의 마무리를 시작한다. 그동안 손빨래만 하다가 까미노길 처음으로 동전세탁기와 드라이기를 사용해서 빨래도 하고 찬바람이 쉭쉭 들어오는 칸막이만 있는 샤워실에서 씻고 저녁도 대충 먹는다. 신발도 축축, 옷도 축축, 몸은 으슬으슬. 내일도 아마 비가 올 텐데… 안 말리면 냄새도 날 텐데…. 종일 발목도 아프고, 종일 춥고, 종일 축축하고, 종일 짜증 나고, 종일 스트레스받는 날이다.
일치감치 이층 내 자리로 올라가서 드디어 노곤한 몸을 눕히니 척추뼈들이 마디마디 펴질 때마다 “우두둑”하고 마치 군대에서 관등성명을 대듯이 ‘몇 번 마디입니다’라고 소리를 낸다. 그런데 침대 바로 옆에 바닥에서 천장까지 태블릿 넓이의 깔끔한 철판이 세워져 있다. 이것이 무엇에 쓰이는 물건이지? 만져보니 따뜻하다. ㅎ 히터다! 이 크고 넓은 도미토리에 딱 두 개의 히터가 보이는데 전체 50여 개의 침대 중에서 우리 자리가 바로 그 히터 옆이다. 에고… 뜨끈뜨끈… 빨래도 보송보송 ㅋㅋ
대부분 알베르게 도미토리는 혼성 도미토리이다. 지금까지 나는 너무 피곤해서 혼성이든지 혼종이든지 심지어 외계인이 와서 자도 몰랐다. 그런데 피코할아버지를 비롯해서 이중 절반은 속옷만 입고 잔다. 난 추워서 침낭 속에서 긴 바지에 조끼까지 입고 잔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자다가 바지도 벗고, 조끼도 벗고, 셔츠도 벗고, 이렇게 조금만 걸치고 땀까지 흘리며 푹 잠을 잔 적은 까미노길에서 처음이다. 죽으란 법은 없다.
밤
나중에 이날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좋은 기억들도 조금 있었던 것 같다. 그날 주워 온 밤으로 군밤도 만들어 먹고, 프랑스에서 온 순례자가 알려준 프랑스식 밤 조리법 ‘살짝 밤껍데기를 깐 후에 전자레인지에 3~4 분’으로 찐 밤도 먹었다. 그렇게 저녁도 먹고 후식도 먹고 서서히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까포베르데에서 온 엘레나가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뭘 건네면서 막 웃고 자기 자리로 도망가 버린다. 주워 온 밤 한 봉지를, 자기들은 무거워서…. 안 받기도 그렇고…. 이런 나쁜 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