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금 30만 원 주고 청담동에서 펌을 해오다 어제는 만 오천 원을 주고 동네 미장원에서 커트를 했다.
친한 후배가 나의 독일행 1년 후 독일로 도착했다. 그녀의 거처가 다름 아닌 프랑크푸르트였기에, 한국서도 돈독했던 우리는 매주 얼굴을 보며 밥을 해 먹고, 울고 웃는 시간들을 갖으며 독일 살이를 헤쳐나갔다.
나보다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 그녀의 이사를 돕기 위해 그녀의 시어머니가 독일로 오셨다. 해외이사를 마치고, 저녁 시간의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하루를 기다려야 하는 후배와 후배의 시어머니에게 우리 집에서의 1박을 제공할 기회가 있었다. 마침 남편이 출장 중이었고, 후배는 해외 이사 통에 정신이 없어 숙박일을 출국 이틀 전으로 잡는 실수를 했다. 호텔 로비에서 시어머니와 당황해하던 그녀가 걸어온 전화에, 남편이 출장 중이니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청담동에서 유명 미장원을 하고 계셨다. 갓 한국서 입국하셨구나 하는 것을 누가 봐도 알아차릴 것 같다. 하얗다 못해 뽀얀 분칠과 멋스러운 올림머리가 30년 경력의 원장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피부 화장은 안 하기가 오래인 독일 생활이었다. 해가 없는 나라지만 자외선은 세다고 하니 외출할 때 선크림 바르는 정도였다. 저혈압으로 혈액순환이 한국서도 안되던 나는 고위도의 독일에 가니 저혈압 증상이 심해졌다. 입술색이 점점 없어지더니 립스틱을 바르지 않으면 아파 보이기도, 생기가 없어 보이기도 해서 립스틱은 필히 발라야 했다.
내가 마주치는, 나를 둘러싼 독일인들을 보며 점점 그들을 닮아갔다. 독일인들에게 명품은 Jack wolfskin 인 것 같다. 노란 늑대 발자국 로고의 잭 울프스킨의 최강점은 바람막이다. 방풍과 방수 기능에 충실한 옷이 독일인들의 삶에 중요하다. 멋이라곤 없지만, 사는 데에 유용하다. 화장은커녕 패션조차도 소박함과 투박함으로 일관된 주변 독일인들을 보면서 비슷해져가고 있었다.
같아 질래야 같아질 수 없으며, 노력도 소용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머리칼이었다.
그야말로 참 머리 중 참 머리인 나의 이 검은 머리는 탈색과 굵은 펌을 하지 않는 이상, 그들과는 아주 다른 형상을 하고 있는 요소다. 나뿐만이 아니라 아이들도 그랬다. 나와 같은 머리칼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 또한 어두운 갈색에 곧게 뻣은 머리카락을 하고 있다. 학교에 가서 수업 중인 아이들을 찾기에 용이하다. 구불거리지 않고 반짝거리는 밤색 머리를 찾으면 된다.
유럽 주재원들의 고민 중 하나가 미장원이다. 차로 20분 거리에 한인 미장원이 서넛 있는 프랑크푸르트 인근 지역의은 유럽 주재원 중에서도 상위 1%의 환경이다. 머리 관리의 차원에서는 엄연히 그러하다
그런데 호박씨는 시내 한가운데 광장 옆 독일 헤어숍을 갔다. 거울과 의자가 6개씩이나 되는 헤어숍이니 짝짝이로 자르지는 않겠지 싶었다. 작은 동네였지만, 시내 가게들은 자리 잡은 지가 오래되어 보였으니 그간 쌓은 실력이 있지 않을까 추측했다.
아이부터 깎여보았다. 미안하다, 아들아. 결과는 짝짝이였다. 가위선이 정직하게 드러나는 아들의 직모는 경사지게 커트되어 기르는 내 내도 우스운 모양새였다. 이 터키인 미용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어보자. 원장인 듯 보이는 이는 독일인이었지만, 아이 머리를 깎아준 이는 젊은 터키인이었다.
한인 미장원보다 5유로나 저렴하니 딱 한 번만 더 시도해보자 싶다. 한인 미장원의 커트 가격은 당시 20유로, 아이들 커트도 15유로 정도다. 한화로 삼만 원 정도라 보면 되겠다. 머리 감겨주거나 두피 마사지 같은 것은 기대하면 안 된다. 머리 안 감고 가면 투덜거리시는 미용사분의 이야기도 들었다.
미용사 분들도 사는 곳의 사람들과 닮아가신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 그 한 사람 한 사람조차도 스스로임에 충실하는 독일인들과 태도를 함께 해가신다. 한인이 늘어가는 추세였으니, 나의 출국 이후에 어떤 서비스 마인드 투철한 미용사가 프랑크푸르트에 오픈을 하셨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내다 보면 주변 사람들과 닮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차로 30분 이내에 접근 가능한 한인 미장원이 있다는 것, 심지어 여러 개 있다는 것 자체로 감사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내 나라 살이처럼 독일에서 살다 갈 거라는 고집에 뭔가를 찾고 시도하는 중이었다.
두 번째 도전, 딸아이의 커트 또한 그야말로 재미난 머리스타일이 나왔다. 한국서 바가지 머리 스타일을 하고 온 딸아이의 머리칼을 자로 자른 듯 반듯하게 커트해주었다. 레고 인형 머리가 된 아이는 귀엽기는 한데, 1970년대 사진 속 어릴 적과 유사해 보였다. 한국서 미용가위를 공수받아야 하나, 그러기엔 내 손은 똥 손인데 싶다.
그쯤에서 단념하고 한인 미장원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나의 헤어컷 도전을 해보았다. 남자 원장님이 계신 C미용실이라, 원장님 외에 여자 미용사분께 머리를 부탁했다. 남자 미용사는 편하지는 않았다.
커트 성공인 데다가 미용사 분도 마음에 쏙 들었다. 프랑크푸르트 온 지 1년남짓이라 적응하고 있는 단계도 비슷해서 그녀와 음식점, 장보기 정보도 공유했다.
커트는 멋스럽다. 가위선이 정직하게 드러나지 않는 스타일이 직모인 나에게는 잘 어울린다. 실험쥐가 되었던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그다음부터는 아이들과 함께 차로 20여분 시골길을 달려 C미장원으로 향했다. 셋이 쪼르르 여자 미용사분께 커트 서비스를 받았다.
펌은 꿈도 꾸지 않았다. 펌 가격도 비싼 데다, 어떤 공산품이든 비싼 독일에서 괜찮은 펌 약을 쓸지도 믿음이 안 갔다. 게다가 석회질이 많은 독일 물에 머리끝이 갈라지고 끊김이 심했다. 펌을 하면 증상이 더 심해질 듯했다.
새 학기가 되면 방학 내 한국을 다녀온 이들이 Before & After처럼 한국물 머금은 멋진 헤어스타일을 하고 학교에 아이들을 데려다주러 나타났다. 부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곤 했다. 이렇게 좋은 유럽에 사니, 한국 갈 필요가 없다며 한국행을 반대하는 남편이었다. 고분고분 그의 말을 들었기에 5년 동안 한국을 가지 못했다. 머리 하러 한국 가고 싶다는 마음과 머리 하러 한국 간다는 게 말이 되냐라는 두 마음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곤 했다. 그래도 나에겐 믿는 구석, C미장원이 있다.
한국에 입국한 지 3일 만에 간 곳은 청담동의 후배 어머니가 하는 미장원이었다. 후배 어머니가 30% 라는 대폭의 친구 할인을 해주었는데도, 머리 하는 값이 30만 원에 달한다. 머리도 감겨주고, 두피 마사지도 해주고, 따뜻한 커피도 한잔 준다. 어디가 불편하냐고 물 온도는 맞냐고 물어봐준다. 서비스들 하나하나에 가격을 메긴다면 싼 가격이다 싶었다. 언제 청담동에서 머리를 해보겠나 싶기도 했다.
무슨 변덕이 나서 싹둑 머리칼을 잘라버렸느냐고?
하룻밤을 제공한 호의로 후배 어머니의 계속되는 할인이 부담스럽더라. 가면 원장님인 후배 어머니가 5년 전 처럼 완벽한 화장을 하고 계신다. 호박씨는 5년 전과 같은 점은 하나도 없더라. 펌을 할 필요가 없어졌고, 외출은 매일 하는 산책 말고는 1주일에 한 번 있을까 말 까다.
한국 미장원은 어딜 가도 터키 미용사보단 잘 깎는다. 자로 잰 듯 바르지 않고 멋스러워 마음에 쏙 든다.
어제부터 거울 보는 내내 기분이 좋다. 시원하게 드러난 목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독일을 떠올려 기쁘기만 하다면, 그 인연들을 거듭 만나면 좋을 테다. 브런치에 독일 이야기를 풀어내다 통곡을 해댄다. 풀어내다 혼자 씩 웃다가도 눈물이 그렁 난다.
청담동 원장님을 만나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닌지가 오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시안이어서 주재원이어서 특별했던 30대는 흘러가고 지금 여기 40대의 호박씨가 키보드를 누르고 있다. 글 쓰는 작가에겐 삐친 머리가 군데군데 있는 시원한 단발이 제격이다. 모름지기 작가란 단정하기보단 아방가르드해야 한다!
" 갑자기 머리 자르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동네 미장원은 남자 미용사 한분이 운영하신다. 이젠 남자 미용사도 편한 때가 왔다. 이 분 뭘 알고 물으시는 것일까? 물음에 답을 못해 정적이 흘렀다. 구불거리는 30만 원짜리 청담동 펌을 잘라내는 이유를 알려드리기엔 커트 시간 30분으로는 부족하기에 호박씨의 브런치를 소개해야겠다.
커트 머리가 미장원 방문이 더 잦다. 펌은 6개월에 한 번 정도지만, 커트는 두 달에 한 번은 가야 하더라. 다다음달엔 호박씨의 브런치를 소개해드리러 가야겠다. 글 쓰는 사람입니다라며 말문을 열어봐야겠다. 혹시 구독자가 한 명 늘어날지도 모를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