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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아나이스

by 호박씨

어제 나를 찾아온 공황발작을 사십춘기라 발검무적 작가님이 불러주신다. 누구나 겪는 일이다라고 여기면 부끄럽단 생각이 사라진다. 사십춘기란 요맘때는 다들 그렇다더라 하면 위안을 주기에 붙여진 이름 같다.

사춘기란 단어도 어른들이 만들어냈을 것이다. 사춘기를 겪는 당사자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감수성이 한창이라, 세상 모든 것, 햇살도 바람도 굴러다니는 낙엽도 나를 위한 것인 듯해 보이던 그때를 지나가면서 단 한 번도 당황스럽단 생각을 한 적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저 젊음들에게 부러움이 반쯤 섞인 시선에서 어른들이 붙인 단어, ' 사춘기' 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호박씨 아들은 사춘기 안 왔어요?"

왔으면 좋겠다. 같은 반 누군가가 예뻐 보인다거나, 엄마가 뽀뽀해주면 피한다거나, 방문을 닫는다던가 했으면 사춘기 지긋지긋하다며 주변 엄마들과도 공유했을게다. 그러나 아들은 아기처럼 안기고, 방문 닫을 줄 모르며, 처음 다가오는 중간고사를 향한 불안함을 울음으로 토로한다.





" 엄마, 아나이스는 여신 같아."

아들의 입에서 나왔던 처음이자 마지막 여자아이의 이름, 아나이스다. Primary School 국제학교 유치원 최고학년은 1학년이다. Elementary 초등학교의 첫 학년이 2학년이라, 1학년들은 유치원에서는 영계처럼 귀엽지도 않고, 성숙하지도 않은 어정쩡한 존재들이다. 앞니가 빠지기 시작해서, 영구 같은 지못미의 졸업앨범 사진도 등장하는 그런 영계 타임이다. 독일 온 지 국제 학교 온 지 1년을 채워나가면서, 막 적응해나간다 싶던 아들의 눈에 여신 같은 얘가 있다니 누굴까 궁금했다.


사립인 국제학교에 학부모가 참여할 기회는 용기만 내면 얼마든지 존재한다. Vonlunteer라는 이름으로 학부모의 공짜 인력을 사용하길 즐기는 학교 덕에, Homeroom 교실은 물론이고 기꺼이 봉사하러 갔던 Art 클래스, 체육시간, 그리고 각종 행사들엔 참여할 기회는 늘 있다. 게다가, 유치원은 오픈 클래스가 분기에 한 번 꼴로 있다.

아나이스의 어떤 면에서 여신을 찾을 것일까 궁금했다. 아들은 아나이스는 배려심이 깊다고 한다. 누구든 도와주며 마음 씀씀이가 곱다고 했다. 물론 초1의 표현은 이렇하지 않았다. 아들은 당시 한창 읽던 만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등장인물들을 가리키며 아나이스를 설명해주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신들은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 만들어진 인간의 모든 면을 닮고 있는 풍성한 콘텐츠임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아나이스의 인간성에 반한 아들의 평가에 미루어 아나이스는 예쁘진 않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리고, 오픈 클래스 날 일찌감치 교실 구석에 자리 잡고, 발표를 준비하는 아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레이더를 세워 아나이스를 찾아본다.


여신보단 천사 쪽이 맞겠는걸. 아나이스를 찾은 순간 든 생각이었다. 성경을 읽은 적이 없는 아들에겐 빛나는 존재가 여신이다. 아나이스랑 함께 있는 아나이스 엄마도 어린 두 동생을 출산한 중년으로 보기엔 날씬한 금발에 반짝이는 눈을 가지고 있다. 스웨덴 인들은 거구일 거라고만 여겼는데, 아나이스 엄마는 골격이 작은 편이다. 스웨덴인이 아닐지도 모르겠어라고 혼자 생각하다 스칼렛 요한슨을 떠올렸다. 내가 아는 스웨덴계 중 가장 유명한 사람, 블랙 위도우도 거구는 아니지.


아나이스만 쫒았다니는 내 눈을 느끼지 못하게 구석에서 관찰 중이었다. 상견례 나온 시어머니 마냥 눈에 힘이 들어간 호박씨라니. 아나이스는 내내 반달눈을 하고 있는 초 1일뿐인데 말이다. 어느새 내 옆에 와있는 아나이스 엄마, 두 쌍둥이를 데리고 오픈 클래스에 온 것을 보면 씩씩한 북구인이 맞다. 내가 서 있는 위치가 아나이스가 잘 보이는 자리가 맞나 보네. 그녀가 내 옆에 서 있는 것을 보니 명당자리인 게 분명하다.

" 부활절 휴가 어디로 가요?"

궁금하더라. 유럽에 주재 나온 나는 유럽 여행만 하기에도 바쁜데, 독일로 주재 나온 스웨덴인에게 긴 부활절 여행은 어디로 짤까 싶다. 처음 보는 내게도 아나이스 엄마는 딸과 같은 반달눈을 하고 답해준다.

" 두바이로 가려고요. 햇빛이 그리워서요. 가서 땀 좀 뺄 거예요."


예비 시어머니 눈에 힘이 좀 빠졌다. 두바이로 부활절 여행 가는 스웨덴 가족 1승이다. 두바이는 가보고는 싶지만, 유럽에선 가는 비행기 편도, 여행상품도 많지만 비싼 두바이 물가에 침만 꼴깍 삼켰더랬다. 아닌 척해보고 싶지만 부럽다. 우아하게 "즐거운 여행이 되겠네, 호호호" 라며 넘기고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나이스랑 잘되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아는 이 중 세상에서 가장 무욕한 인간이 호박씨 아들이라 벌써부터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인 듯 걱정이 된다.

김칫국부터 마신 호박씨를 아는 듯 아들 입에선 아나이스 이후로는 7년이 지난 지금까지 누구의 이름도 올라오질 않는다. 돌이켜 보면, 처음 누가 좋구나 싶을 때가 나에겐 초등학교 3학년 열 살 정도였다. 짝꿍이 좋았던 10살의 호박씨였다.

Primary grade면 늦된 것도 아닌데, 첫아이에다가 아들이다 보니 큰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늘 아이 키보다 좀 더 위를 향해 있었다. 조금만 더 , 조금만 더라며 아이에게 재촉하고 주변을 둘러보고 또래랑 비슷한지 비교하고 안심하거나 또 불안해함의 연속이었다.




공황장애라 붙이기도 사십춘기라 이름 붙이기도 싫은 날이 어제부로 지나갔다. 고요한 집에 가만 누워 있으면 집에 있을 수 있어서 행복하고 다행이다 싶다가도, 영영 대문 밖을 못 나가면 어쩌나 하는 마음의 소리가 메친다. 불안해하는 시선으로 지금까지 큰 아이를 바라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온다. 기억을 더듬어 아이가 조건 없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갖었던 그때를 찾아냈다.

아나이스 Anais. 은혜로움이란 의미의 안나 Anna와 이름의 뿌리를 같이하는 꽃향기가 나는 이름이다. 은혜로운 마음을 갖고 있었던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내 불안함에게 다독거려 본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이다. 사춘기여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이다. 지금 이대로 은혜롭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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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쿠스와 아리아드네, 티치아노, 1520-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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