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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들의 오지랖

by 호박씨

이틀 연속 친정엄마에게 10시에 전화가 온다.

약국 앞 병원 소아과의 유치원 아이들 등원 시간에 밀려드는 조제는 10시가 되면 잦아든다. 엄마에겐 동생에 대한 생각이 밀려오고 전화를 거신다.

" 어제는 걔가 빅토리아 케이크를 구웠는데, 진짜 괜찮더라. 지금 지하철 타고 가서 맛을 봐봐."

인스타로 동생 케이크는 이미 확인을 했다. 자칭 창업 퍼실리 에이터, 파티쉐리 매니저를 하고 있다 보니,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고 있는 동생의 상태에 대해서 따라가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 진행 상황은 계속 따라가고 있어, 엄마. 걱정되지?"

"아니. 내가 언제?"

잡아떼신다. 흔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읽는다.






독일인들은 질서 정연한 것을 좋아한다. 공동체가 합의한 바를 지켜 나가는 것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한산한 읍내 주차장, 주차를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자전거가 멈춰 서서 뒤 범퍼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다.

독일은 차도 작지만, 주차공간은 더 좁다. 차를 앞뒤로 넣었다 뺐다 안간힘을 써봐도 아까 그 형태 그대로다.

포기다.

비뚤게 대지 뭐. 사선으로 잘린 공간에 맞춰 넣기 힘드니 능력 되는 데까지만 맞추고 그만둬야겠다 싶다.

대충 대고 가야지.

방금 전까진 자전거 탄 사람 한 명이였는데, 지나가던 노인도 그 옆에 섰다. 구경꾼 한 명 더 추가다.

두 사람이 입을 모아 말한다.

" 주차 다시 해야겠어요."

" 차가 삐뚤게 주차되었어요. 당신 차가 선을 밟았다고요."

사실, 두 사람의 독어를 정확하게 알아듣진 못한다.

" 뭐라고요?"

영어로 응수하니, 자전거 인간이 영어로 답해준다. 아까 그가 건넨 독일어가 제대로 주차하란 말이구나 하고 추측한다.

동양인 여자가 독일어를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나라 말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한 다는 점.

선을 밟지 말고, 똑바로 대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점.


오지랖이다. 곤경에 빠졌을 때에 독일인들의 선한 오지랖이 한 몫한다. 웅성웅성 모여들어 도와주려고 애쓴다.

읍내 주차장 구석 자리에 주차를 하고 돌아와 보니, 90도 각도의 자리에 대형차가 주차되어있었다. 비좁은 자리에 기막히게 주차해뒀군 하고 감탄할 때가 아니란 사실이 곧 밀려왔다. 문제는 호박씨 차를 빼내는 것이었다. 독일인들이었다면 주차가 금지된 자리에 주차해둔 차주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상대방이 오면 호되게 나무랐을 것이다. 독일인이 아닌 호박씨는 기다리기 힘들다. 상대가 온다고 해도 독어로 쏘아붙이지 못한다.

차를 열 번 넣었다 뺐다 하고 있으니, 할아버지 두 분이 다가오셨다.

"내가 빼줄까?"

" Ja, Bitte."

네. 제발요.

차키를 넘겨받은 할아버지는 두세 번 전진, 후진, 핸들 꺾기 권법을 사용하여 차 머리를 빼주신다.

아, 독일인들의 오지랖이 좋다. 눈을 마주치며 다가오고, 도와줄까의 눈빛을 쏘는 무리들을 사랑한다.

나 대신 기발한 능력을 발휘하여 주차된 대형차를 향해서 흔들어대는 고개와 불만 가득한 말투가 마음에 든다.





사소하건 크건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기득권이 된 소시민의 특징이 아닐까? 넘어갈 만한 교통법규나 교통 예절에 대해서 독일인들은 넘어가는 법이 없다. 독일에 사니, 독일어를 알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따지러 올 때도 독일어 할 줄 아느냐 묻는 경우도 없었다.

회전 교차로는 라운드 어바웃이라 일컫는다. 라운드 어바웃이야말로 눈치 작전의 최전선이며 운전을 통한 의사소통 능력 테스트의 실전 장이라 볼 수 있다.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며, 왼쪽에서 들어오는 차가 우선이다.

라운드어바웃에 두세 번 정도 성공하고 나서는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수화 능력을 갑자기 탑재한 기분이었다. 읍내 라운드 어바웃은 통행량이 적어 작게 실력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장소였다. 집에서 읍내로 들어와 라운드어바웃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오른쪽 차가 한참을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른쪽 길은 1차선으로 다른 차선보다 좁은 데다 운전자가 여자였다. 그녀와 눈이 딱 마주친 순간 수신호로 그녀에게 먼저 가라고 했다. 라운드어바웃 처음 왔나 보네. 저 기분 알고도 남지. 그녀의 얼굴이 보일 만큼 맑은 날이었고 가까운 위치였다.

그녀를 먼저 보내 주고니 뿌듯하다. 신난 기분에 왼쪽을 보지 않고 교차로로 진입했다. 왼쪽에서 차량이 다가온다. 이런. 속도를 내어 아슬아슬 그 차를 앞질러 목적지인 은행 방향 나들목으로 빠져나왔다.

은행 앞 주차자리는 소형차 한 대 자리 댈 수 있는 자리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잠시 은행에서 출금만 하면 되는데, 주차자리를 찾는 것도 싫고 주차요금을 내는 것도 싫다. 그날따라 자리가 비어있다. 라운드어바웃에서 행한 착한 일에 대한 보답이구나 여기며 주차를 하고 ATM 기기로 다가갔다.

독일 남성이 볼륨이 높은 독일어로 나를 향해 외친다.

" Pardon?"

뭐라는 거지?

그가 독일어로 다시 또박또박 말한다. 알아들을 수 없긴 마찬가지다.

" 뭐라고요?"

그제야 영어로 말하는 독일인.

"내 순서였다고."

아. 그는 라운드 어바웃 왼쪽에 있던 차의 운전자였다.

200 미터 되는 라운드어바웃에서 은행까지 내 차를 쫓아와 주차를 하고 가르침을 남기고 갈 작정을 한 것이었다. 그 독일인은 " 내 순서였다고!" 룰 영어로 내뱉었다.

" 미안."

들고 싶었던 말을 들어서 떠난 건지, 가르침을 완수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그는 나의 I am sorry의 절반은 잘라먹은 체 고개를 돌려 갔다. 그런 그의 뒤를 쳐다보고 서있었다.


라운드어바웃의 이용방법도 모르면서 운전을 하러 나온 이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 선의라고 여기는 것일까? 그날 혹시 생겼을 수도 있는 사고를 막았다는 대업을 이뤘다고 생각할까? 옳은 일을 했다고 스스로를 여길 것 같다. 그의 말투와 걸음걸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오지랖에서 공포심을 느꼈다. 내 뒤를 따라 밟아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하고야 마는 지독함에 숨 막혔다. 서로가 서로를 살피는 아름다운 시민의식과 끝없이 간섭하고 참견하는 상식이라는 잣대의 균형점은 어디쯤인지 궁금하다.


원칙을 지키면 남이 보기엔 불안하지 않다. 정해진 규칙이 있다면 그것을 따르는 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을 준다. 남의 마음에 들고 살겠다 마음먹었다면 그리 살면 된다.

다시 독일에 나가게 된다면, 나를 쫓아 돌아오는 독일인을 향해서 또박또박 눈을 맞추고 말해주고 싶다.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라운드어바웃의 원칙은 알고 있다.

오른쪽 차에게 선의를 베푸니라 너의 차를 깜빡 보지 못했다.

그는 호박씨의 이런 설명을 들어줄 시간이 되리라 본다. 쫓아올 시간도 충분했던 그였으니까 말이다.

그의 불안함을 안심시켜줄 선한 행동을 베풀고 싶다.




불안해 한 적 없다고, 걱정한 적 없다고 잡아떼는 엄마에게 그간 동생과 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엄마에겐 시간이 있다. 불안하니 엄마의 전부를 바쳐 도와주었고, 넓은 오지랖으로 꽃길만을 깔아 주려고 해왔던 우리 엄마. 엄마를 오늘은 전화 통화로 안아주었다.

"엄마, 가시에 찔려도 괜찮아. 피가 나도, 고통이 있어도 죽지 않아. 살아남을 것이야."

돌려 돌려 말했는데, 엄마는 알아들으셨을 것이다. 내일은 아침 10시 30분에 전화가 오지 않을 예정이다.


살아남을 것이다. 라운드어바웃에서 사고가 일어난다고 해도 죽지 않을 것이다. 파티쉐리가 3개월 동안 매출이 제로라고 하더라도 실패는 아니다. 3개월 후에는 어떤 일이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죽지 않았다면, 끝이 아니다. 살아있다면 아직 기회는 남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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