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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독일 숲이라 생각하자.

by 호박씨

오후 3시, 청소기를 돌리고 나니 땀이 눈물처럼 떨어진다. 얼음을 가득 채운 큰 잔에 탄산수를 채운다. 뱃속이 시원해지니, 진정이 된다. 지구 사랑한답시고, 에어컨 안 틀고 더위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겨뤄보는 중인데, 백기 들고 싶어 진다.

N에게서 전화가 왔다. 땀이 눈으로 흐르다 못해 안경까지 흘러내리는 이 순간, 핸드폰 화면에 뜬 N의 번호를 보고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N 덕분에 핸드폰 액정에 눈이 내리는 듯하고 핸드폰을 쥔 내 손끝이 시려온다.



국제학교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가정집이 나의 독일 집이다. 부엌 창에 서면 정문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책가방이 보인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 레깅스에 바람막이를 챙겨 입고 국제학교를 둘러싼 타우누스 숲으로 걸어 나갔다. 걸으러 나가지 않으면 하루 종일도 집에 있을 수 있는 그런 날씨가 대부분이었다.

밖을 보니 밤새 내린 눈이 쌓여 있었다. 덜 내렸는지 잔뜩 찌푸린 하늘의 표정을 보아하니 눈이 곧 더 올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이들은 국제 학교 운동장에서 눈사람을 만들 것이다. 아침에 장갑을 두 벌씩 챙겨서 나갔다. 초등 전 학년이 한데 Recess 쉬는 시간을 즐긴다. 며칠 전에도 눈이 쌓였던 날, 아들은 친구들과 눈 뭉치를 만들어 어린 학년들에게 눈 뭉치를 팔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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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니까, 얘들이 즐긴다는 생각만으로도 즐거워야겠지만, 머리를 굴려본다. 눈의 왕국을 독일 하늘이 선물해줬으니, 제대로 받아서 있는 내 나름 힘껏 즐겨야 하니까. 숲 안쪽까지 들어가면 설경이 끝내줄 것이라 생각했다.

N은 국제학교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살고 있어, 아침마다 아이들을 학교 정문 앞에 내려주곤 했다. 눈이 많이 내린 날은 N은 서둘러 학교에 얘들을 drop 하고 집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부랴부랴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 산에 가실래요? "

그녀가 이미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있었다. 산에 갈 복장을 챙겨 입고 나온다 했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것이 서너 번이었다. 그럼에도 흔쾌히 따라나서 준다.

15분쯤 후, 부츠와 장갑을 끼고 온 N과 국제학교 정문을 지나 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정문을 지나 5분 정도 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더 이상 차가 다니지 않는 빽빽한 숲이 펼쳐지기 시작하다. 여름은 에어컨보다 서걱한 공기를 만들어주고, 가을에는 단풍으로 레드카펫을 깔아주는 숲길이다. 어떤 철이건 좋지 않은 때가 없다. 매일 가는 길이지만, 눈이 모든 것을 덮어버려 처음 오는 듯했다. 15년을 만난 남편이지만, 처음 만난 사람처럼 섹시하고 보이는 순간이 5년에 한 번쯤은 온다. 5년의 한 번보는 남편처럼 숲은 태어나 처음 만난 눈 풍경을 보여준다.

N과는 말이 잘 통했다. 몇 년을 매일 다닌 길이라, N과 경치에 제대로 빠져들었다. N의 눈에도 하양이 가득, 내 눈에도 하양이 가득. 하양은 사실 모든 색을 반사시켜 색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 숲 가득한 눈은 그 어느 것도 같은 색이 없다. 가지에 얹힌 눈, 수북이 쌓인 눈, 떨어져서 가루가루 날리는 눈. 똑같아 보이는 풍경은 한 군데도 없다. 무엇부터 먹어야 하나 싶은 뷔페상차림 앞의 아이처럼 이리저리 눈 굴리기에 바쁜 우리였다.


주재가 끝나고 한국을 돌아가면, 수많은 여행지는 생각도 안 난다고 했다. 그리운 것은 동네라고 했다. 동네 독일인들은 머물다간 주재원을 그 동네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겠지만, 머물렀던 이에겐 그곳이 그리운 것이 된다. 이 눈 풍경을, N과 걷는 산책을 그리워하겠구나 하고 확신했다. 물론 이렇게 키보드로 그날을 한 올 한 올 새기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한참을 눈의 여왕과 눈의 여왕의 친구인 귀족부인처럼 숲을 돌아다니다 보니 여기가 어디쯤인가 싶었다. 매일 다니던 길인데 새롭다. 눈은 숲 곳곳에 눈도장 찍어두었던 표지들을 모조리 덮고 있다. 그러니, 4년을 다닌 길이여도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히기 시작했다.

N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내 숲 인양 모시고 온 산책길이다. 이러다 잘하면 헨젤과 그레텔 주재원 버전 하나를 써내거나 교포신문에 우리 둘의 행방불명이 쓰일 판이다. 구글맵을 켜보았다. 국제학교로 목적지를 정하고 왼쪽으로 걸어 나가 본다. 반대쪽인가 보다. 오른쪽으로 걸어 나가 본다. 제발...

말을 아끼는 N이다. 그래서 재잘대기 좋아하는 나와 결이 맞는 이다 싶어서 그녀가 좋았다.

말없이 눈 구경에 빠져있던 N이 한마디를 한다.

" 괜찮으세요?"

아이고야....

이럴 땐 솔직한 게 낫지 싶다.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 집이 지척인 이 산에서 명을 다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눈이 덮여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네요."

이럴 땐 왜 화장실도 가고 싶은지. 그때 어디선가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소리다. 반가워라.

눈으로 방향을 찾기 힘들다면, 귀와 코를 사용하자 싶다. 국제학교 유치원에서 산책 나온 꼬마들이었다. 몇 년 전이였으면 딸도 저 무리 속에 속해있었을 것이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니 하얀 눈 사이로 방한모자가 한 둘 보인다. 꼬마들의 소리 지름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그제야 N을 보며 웃을 수 있었다.

" 이제 산에 오자는 얘기 다신 안 할게요."

N이 크게 웃었다. 주재 첫해인 그녀다. 주재 말년의 호박씨 덕에 눈 덮인 산은 함부로 오는 게 아니란 사실을 배웠다고 했다. 덕이라고 말하는 N의 말속에는 N의 맑은 배려가 담겨있다. 반하고도 남을 그녀다. 왜 이런 사람은 주재 말년에 만나는 것일까? 왜 이런 눈의 왕국 풍광은 주재 말년에 발견하는 것일까?




N이 걸어온 보이스톡을 보며, 서늘함을 느낀다. 역시 N은 인연이다. 그녀와 내내 잘 지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주르륵 비 오듯 쏟아지는 땀과 함께 청소리를 돌리고 있는 나를 어디선가 그녀가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타이밍 맞춰서 전화했을 것 같다. 우리의 산책을 떠올리면서, 땀 좀 식히라고 말이다.

늘 그렇듯, 한더위도 절망도 고통도 시시각각 변하며 나를 스쳐 지나간다는 사실을 그녀는 내게 일깨워준다. 몇 년 만에 걸려온 전화에도 어제 만난 듯 이야기할 수 있는 인연이다. 밥 한 번 같이 먹고, 차도 한번 마시고, 산책 딱 한번 갔던 인연인데 글은 무더기로 쏟아지는 선물 같은 사람이 N이다. 그녀의 귀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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