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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Dec 06. 2021

전공이 짝사랑

나는 짝사랑 전문가다. 고1 때 좋아하던 문예부 선배, 대학교를 입학하여 첫 신입생으로 좋아하던 과 선배, 회사 입사하여 좋다고 했던 입사 동기. 낯선 곳에 도착하면 든든해 보이는 대상을 찾고, 그 대상이 내 사람이 되면 낯서 곳이 정들 것 같다는 착각을 한다. 내 짝사랑의 가장 큰 특징은 환경이 바뀌었을 때이다. 

때문에 주변 환경에 대한 파악이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가 어떠어떠할 것이다 짐작하며 내 믿음은 틀릴 리 없다고 여겼다. 대상의 실체에 대해서는 사실 관심이 없고, 이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기엔 고달픈 나의 사정을 해결할 멋진 해결사가 될 법해 보이는 사람을 막연하게 좋아한다. 따라서  그의 현재 상태 예를 들면 그가 방황하는 점, 그가 힘들어가는 점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더 큰 문제점은 그에게는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오직 내 감정에만 충실해서 상대가 나에게서 어떤 매력을 찾을 지에 대해서는 1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일방적인 감정은 어김없이 짝사랑으로 끝난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그야말로 배낭을 메고 유럽을 갔다. 나는 유럽을 짝사랑했기에 진정한 유럽을 알만한 깜냥은 안됬으며, 유럽에게 나는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몹시 무지했다. 나에게 유럽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였으며,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아테네 여신의 금빛 신전이었다.  배낭을 멘 맨발의 나에게 유럽은 그저 책으로 보던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놀라움의 연속인 곳들이었다. 다음 생은 스위스 국민으로, 그다음 생은 이탈리아 인으로, 또 그다음은 비엔나 시민으로 태어나겠다는 꿈을 꾸었다. 나는 현재의 유럽을 즉시 할 겨를 없이 과거의 유럽과 이미 강한 애착에 빠져, 현재의 유럽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지를 알아차릴 겨를이 없었다. 

관광객들에게 악명 높은 이태리도 나에겐 그저 도처에 볼거리가 깔린 마음에 쏙 드는 도시였다. 한인 민박과 유스호스텔, 유로패스의 좁은 2층 침대도 나에겐 낭만이기만 했다. 돈 없는 배낭여행객이기에 차별을 당할 만한 곳에 접근하지 않았고, 나를 박대한다고 해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내가 뭘 실수했겠거니 생각했다. 앉아서 식사를 하는 레스토랑을 딱 한번 이용한 적이 있는데 현금이 거의 없어  말도 안 되는 팁을 주자 이 체코 웨이터가 "FXXX"을 내게 뱉어냈다. 강철 멘털이라 팁이 너무 적었지 이렇고는 넘기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니 그 경험은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스멀스멀 기억 저편에서 떠오른다.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독일 땅을 밟는 순간부터 내가 느낀 것은 짝사랑의 배신이었다. 짝사랑 전문가가가 짝사랑의 대상을 갈아탈 때에는 보통 상대가 나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저 마음이 바뀌어서이다. 시작도 나 혼자 끝맺음도 나 혼자다. 낯선 상황이 익숙해지고, 삶에 여유가 생기면 짝사랑의 대상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처음부터 나는 진심으로 누군가를 좋아하며, 그가 나를 좋아하길 바란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유럽은 내 상상 속에서 콩깍지가 쓰인 체 여행자로 바라본 유럽일 뿐이었구나라는 사실을 나는 주재 기간 내내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사랑한 유럽은 내 사랑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나의 그 감정 조차 바람 불면 날아버릴 얇디얇은 한 겨풀의 모슬린 조각일 뿐이다. 

그러니 나의 5년은 간사하며 이기적인 내 감정들로 가득 찬 과거를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여행자도 아닌, 이민자도 아닌 길게 머무르는 이인 주재원은 지극히 중간자이기에 유럽의 주인인 이들에게 내쳐지기도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독일인들에게 그리고 독일의 한국인들에게서 받는 그 시선들 속에서 진짜 유럽을 보았다. 눈먼 짝사랑의 값쌈을 느꼈고, 서른의 끝에서 여전히 철없는 나를 느꼈다. 


물론, 철이 다든 것은 아니다. 철이 다 들어버리면 단명한다기에 철이 덜 들었다고 해두자. 삶은 더 살아가야 할 이유가 얼마든지 있으며, 난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짝사랑하고 싶은 것도 아직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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