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탬)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의사소통하고 감정을 교류한다는 것이다. 친구든, 연인이든 마찬가지다. 상호작용은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관계라 함은 서로 보탬이 되는 관계일 것이다. 관계의 참여자는 ‘나’뿐 아니라 ‘우리’기 때문에 ‘우리’가 좋아야 한다. 따라서 나만 생각하기보다 우리를 생각해야 한다. 서로 보탬이 되기 위해선 내가 받는 것도 중요하고 내가 주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대부분 자신이 받을 것을 우선한다. 자신이 받는 것에 더 신경 쓴다. 상대방을 통해 무엇을 수취할 수 있는지 계산하고,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 한다.
이해타산에 안 맞으면 “정 떨어진다.”, “도움 안 된다.” 등의 사유를 대며 이별을 고한다. 그렇게 쉽게 관계의 끈을 놓아버리고 자신을 충족시킬 새로운 상대를 찾는다.
자신이 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충족시켜줄 사람을 찾는다. “괜찮은 여자가 없네.”, “괜찮은 남자가 없네.”, “진실한 사람이 없네.” 등 수취하는 사람(taker)으로서 도움 되는 사람(giver)을 못 찾고 있는 야속한 상황을 스스로 안타까워한다.
관계의 동기가 이기심에 바탕한다. 외로움, 우울감, 심심함, 무료함, 자존감, 경제력, 지식 등 상대방이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길 바란다.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중요시한다. 받은 것을 넘어 상대방에게 희생을 요구하기도 한다.
“나 좋아하면서 그것도 못 해줘?”, “친구끼리 그것도 못 해줘?”라며 희생을 요구하고, 희생으로 사랑을 확인하고자 한다. 물론 상대방이 때때로 희생정신을 발휘하며 사랑스러운 마음을 표현하고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건 타인의 과제다. 타인이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몫이다. 그런 타인의 과제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기대하고 조종하는 것은 내 이기적인 마음이다.
몇 번의 희생적인 사건은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계속 발생한다면 파괴된다. 지속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상대방을 파괴시키는 행위다. 자신이 만든 기대에 자신이 실망한다. 그 기대감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관계를 수취해야 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본다는 것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얻고 싶은 조건과 요구들, 그 기준에 부흥하지 못하면 실망하고 원망한다. 그렇게 상대방을 갉아먹는다.
자신의 인정 욕구, 사회 이미지, 정체성, 결핍, 강박, 이상을 수취하는 관계로 해결하려 한다.
나는 서로 보탬이 되는 관계를 맺고 있는가? 아니면 갉아 먹는 관계를 맺고 있는가?
상대방은 내 결핍을 채워 주는 도구가 아니다. 서로 사랑해야 할 관계다. 나를 만족시켜주고, 나에게 맞춰주는 존재가 아니다. 내 삶과 상대방의 삶은 다르다. 같은 세상 안에 같이 얽혀 있어도 삶은 두 개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각자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 수 있도록 조력하고 응원해줘야 한다. 내 삶의 기준으로 유도하고, 요구하고, 조종하면 상대방의 삶은 없어진다.
“사랑은 서로의 눈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넓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 stewart emery -
한 가지 삶으로 응축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의 삶이 만나 더 넓게 삶을 확장시켜야 한다. 내 결핍을 채워 온전한 하나가 되는 것을 기대하지만 수취하는 태도는 오히려 상대방의 것을 빼앗아 서로를 소모시킨다.
각자의 개성, 자율성을 상실한 채 서로에게 의존하는 관계가 아니라 온전한 삶대 삶으로 만나 서로가 시너지를 내고 보탬이 되는 건전한 관계를 지향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사랑을 받기보다 사랑을 줘야 한다. 무언가 기대하기보다 그저 사랑스러운 존재, 사랑스러운 한 사람의 삶, 그 자체를 아름답게 바라보자. 나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면 남도 사랑할 수 없다. 이상적인 로맨스, 충족해야 하는 관념적 조건들, 나의 결핍으로 그 사람을 괴롭히지 말자. 내가 먼저 바로 서서 상대방에게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있어야 나도 온전한 사랑을 받을 수 있다. giver와 giver의 만남을 위해선 내가 먼저 giver가 되야 한다.
2 x 2 = 4, 1/2 x 1/2 = 1/4, 결핍된 1/2이 되어 상대방에게 수취(take)하려 하지 말고 2가 되어 상대방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먼저 주자(g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