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세계의 시작.

by 거북이

첫 번째 조각이 허공으로 사라진 뒤, 나와 관리자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이전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이지만 더 큰 의문이 머릿속을 채운다.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관리자를 바라본다. 그리고 힘 빠진 목소리로 말한다.


"넌 누구야? 그리고 이 세계는... 왜 만들어진 거야?"


내 질문에 관리자는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그저 나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만 본다.

그의 몸을 이루던 픽셀들이 미세하게 떨리며 이전과는 다른 깊은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세계의 시작은... 하나의 거대한 욕망이었어. 그리고 그 끝에서 피어난 아주 작은 사랑이었어."


관리자는 먼 과거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의 목소리를 통해 나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부모님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21세기 초반, 세계는 보이지 않는 전쟁 중이었어. 총성 없는 전쟁, AI 인공지능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기술 전쟁. 미국과 중국을 필두로 한 강대국들이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부으며 서로를 추격했고, 그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은 곧 국가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어.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어. 수많은 예산과 인력이 투입되었지만, 선두 주자들과의 격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지. 정부와 과학계가 초조함에 휩싸여 있을 무렵, 한 줄기 빛과 같은, 그러나 너무나도 위험한 논문 하나가 발표되었어.


'신생아의 뇌는 출생 직후 약 1000일간, 성인의 뇌를 훨씬 뛰어넘는 폭발적인 활동을 보인다.'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 경이로운 힘. 그것은 미지의 영역이었고, 동시에 AI개발의 판도를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악마의 열매'였어. 정부는 망설이지 않았지. 즉시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신생아 뇌파 연구 프로젝트', 코드명 '프로젝트 제네시스'를 극비리에 출범시켰어.


그렇게 국가 최고의 두뇌들이 하나의 목표 아래 모였어. 그 프로젝트 팀에는 너의 부모님, 회사 동료인 기안 씨, 팀장이 소속되어 있었어. 처음에는 모두가 애국심과 과학적 탐구심에 불타올랐어. 인류의 미래를 바꿀 위대한 첫걸음이라 믿었거든.


연구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어. 신생아의 뇌파 패턴을 분석하여 새로운 AI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성과들이 나타났어. 하지만 연구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어두운 진실과 마주하게 되었어. 신생아의 뇌는 폭발적인 힘을 가진 만큼, 리스크도 컸어. 외부에서 그 힘을 추출하거나 인위적으로 자극할 경우, 뇌의 특정 영역, 특히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에 영구적인 손상을 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어.


쉽게 말해, 우리가 연구하는 아이들이 평생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이야.

그 결과가 보고되자 프로젝트 팀은 둘로 나뉘었어. 대다수의 연구원들과 정부는 '위대한 진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며 연구 강행을 주장했어. 하지만 너의 부모님과 기안 씨, 팀장 등 몇몇 팀원들은 그럴 수 없었어. 명백한 살인이기에.


그리고 그때 당시 너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였어. 당연히 너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지.

그날 이후, 우리의 비밀스러운 반역이 시작됐어.


낮에는 정부의 계획대로 연구를 진행하는 척하면서 밤에는 모두가 퇴근한 연구실에 남아 우리만의 세계를 만들기 시작했어. 최악의 경우, 아이들의 기억이 손상되더라도 그 기억을 온전히 보존하고 언젠가 다시 되돌려줄 수 있는 아카이브. 우리는 그것을 '기억의 아카이브'라고 불렀어.


정부의 눈을 피해 우리는 이 거대한 가상 세계를 설계한 거야. 너의 부모님은 자신들의 기억을 첫 번째 데이터로 삼아 실험을 시작한 거야. 너의 부모님이 이 세계를 만든 창시자야.


너를 처음 품에 안았던 기억, 너의 첫걸음마를 보며 웃었던 기억, 네가 아파서 심장이 떨렸던 기억, 등 모든 순간들... 그 모든 사랑의 기억들이 이 세계를 이루는 기둥이 된 거야.


우리는 믿었어. 이 아카이브가 완성되면, 정부의 비인간적인 계획을 막고 아이들의 영혼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우리는 정부의 집요함과 기술에 대한 그들의 탐욕을 너무 얕보고 있었어.


관리자는 입을 닫는다. 그의 몸을 이루던 픽셀들이 슬픔에 잠긴 듯 파르르 떨리고 있다.

모든 것이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평범한 연구원인 줄만 았았던 부모님. 그들이 국가의 거대한 계획에 맞서 싸운 저항가였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세계가 그들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세계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마주해야 할 '회색 파일'은 단순히 나의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부모님이 지키려 했던 것들이고 나에게 남긴 유산인 것이다.


"그럼.. 당신은...?"


나는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관리자를 바라본다. 관리자의 형체 위로, 아주 희마하게 따뜻하게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 어?"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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