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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Feb 16. 2023

그땐 어느 집이나 이사를 많이 가는구나 싶었습니다.

1년에 3번의 전학은 기본이었거든요.

유치원 졸업식날 저는 서울로 전학을 갑니다.

그래서 누구나 있는 유치원 졸업사진이 전 없습니다.

어린 마음에 친구집에 가면 있는 졸업사진이 그땐 정말 부러웠어요.


나의 앞으로의 서울 생활이 어떤 시련이 될지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서울에서 국민학교 입학을 했습니다.

부모님은 의류공장을 운영하셨습니다. 미싱으로 옷을 만들어 납품하는 일이셨습니다.

공장은 3층에 위치하였고, 우리 가족들은 옥탑방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언니들이 학교에서 늦게 오는 날이면 저는 혼자 티브이를 켜두고 언니들을 기다렸습니다.

티브이를 보다 잠들어 언니들이 집에 도착하는 꿈을 꾸며 "언니"하며 깨기도 했었습니다.


옥탑에 사니 좋은 점도 있었어요.

타원형의 큰 고무 대야에 엄마는 작은 텃밭을 만들어 상추며 여러 채소들을 키워먹기도 하셨고

그 옆에 우리들에 작은 놀이터로 비닐온실을 만들어 아지트놀이도 하며 지냈습니다. 

비가 오늘날 후드득 소리가 좋아 많이 돌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전 아직도 비 오는 날 우산 쓰기를 좋아하는 듯합니다.


어린 마음에 쳤던 장난이 하나 기억에 납니다.

천 원짜리에 바늘로 흰 실을 묶어 옥상에서 1층으로 내려 지나는 사람들을 놀렸던 적이 있었는데

돈을 주우려던 할아버지께서 애들 장난임을 아시고 큰소리로 혼내시며 쫓아 올라오시려 하는 시늉에

지레 겁을 먹고 후다닥 집으로 숨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두 번 다시 하지 않았습니다.

그 할아버지를 또 만나게 될까 겁이 많이 났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잠에서 깬 나는.

엄마가 옷가지들을 챙겨 짐을 싸고 계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갑자기 한 밤중에 이사를 가야 한다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습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1년에 3번씩 혹은 4번씩 자주 이사를 다녔습니다.


서울 어느 한 마을. 언덕 가장 꼭대기집에 우리는 이사를 했습니다.

달동네처럼 우리 집은 너무도 허름한.. 방과 방이 제대로 나뉘지도 않았고

부엌이라고 볼 수 없는 현관 겸 부엌이 위치한 판자촌집이었습니다.

우리 옆집에는 밤에만 일하러 나가는 건달아저씨들이 살고 있었고

가끔 낮에 마주치면 과자 사 먹으라며 천 원씩 주시곤 하시는 좋으신(?)분들이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굉장히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정말 다행히도 우리 주변엔 나쁜 사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학교로 다시 놀러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언덕에서 내려와 도로를 건너야 학교에 도착을 할 수 있는데

그 도로에서 전 교통사고가 납니다.

은색의 봉고차가 제 오른쪽 발을 밟고 지나가 발이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동네에서 사고를 목격한 주변 상인분들이 뛰어나와 저를 부축해 주셨고 발을 딛어보라 하셨지만

다친 내 발은 무척 뜨거운 불덩이 같은 느낌이었고,

마치 땅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내 발을 밀어내는 듯하였습니다. 이것이 아픔인지도 전 잘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도저히 땅에 발을 내려놓을 수가 없어 한 발을 든 채 주변 화단 같은 큰 돌에 앉아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엄마는 근처 공장에서 미싱일을 하셨습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엄마회사로 연락을 해주신 동네 아주머니.

그렇게 시간이 한참 지나니 저 멀리서 엄마는 헐레벌떡 뛰어오셨습니다.

엄마와 함께 사고를 낸 차량을 타고 전 병원에 입원하러 출발합니다.

그렇게 한 달 보름의 병원신세를 지게 됩니다.

엄마는 저를 간호하기 위해 일을 그만두셔야 했습니다.


1년을 채 살지 않고 우리는 눈 내리는 밤 또 이사를 합니다.

그날은 언덕에 내려앉은 눈이 반짝거려 길전체가 다이아몬드가루가 흩뿌려진 듯 보였던 아름답고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토큰가게로 이사를 해 생활을 하던 때였습니다.

(토큰. 옛날 서울버스를 탈 때 사용하던 일종의 버스요금)

홍수로 집에 물이 무릎까지 차올라

이불이며 옷, 모든 살림살이가 흙탕물에 젖어 일주일 넘게

빨래들을 빨고 말리고를 반복했었습니다.

대야에 이불을 넣고 발로 밟아 빨았던 기억이 납니다.

한 번은 명절을 맞아 시골집에 다녀와 보니

집에 도둑이 들었었습니다.

그 당시 뒷문을 잠그는 열쇠는 마치 모기향처럼 생긴 동그란 철제로 된 잠금쇠였는데

문틈으로 철사를 넣어 돌려 잠금쇠를 열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온 집안을 뒤지고 들쑤셔 놓아 옷가지들은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판매하려고 사놓아 둔 토큰과 잔돈으로 사용해야 할 천 원짜리 지폐들과 동전들 모두를 도둑맞았습니다.

어린 눈으로 본 도둑이 훑고 간 그 광경은 무서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게 또 우리 집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토큰가게에서 어머니께서는 과일장사도 같이 하셨습니다.

엄마 몰래 귤을 먹고, 엄마께 들켜서 혼나기도 하고 제 기억엔 판매한 양 보다

우리 가족이 먹은 양이 더 많았던 거 같습니다.

엄마는 또 한편에서 미싱으로 소일거리도 함께 하셨습니다.

엄마의 미싱질을 옆에서 보고 있자면 꼭 손을 다치실 것만 같아 늘 무서워 오래 지켜보기 힘들었습니다.

미싱일을 하시다 토큰과 과일을 판매하시려 일어서시다 손이라도 다치실까

전 매일 엄마와 함께 장사를 도왔습니다.


그쯤 어머니는 병이 나셨습니다.

병원에 어머니는 입원하시고 저의 기억으로는 6개월은 떨어져

살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안 계셔서 토큰가게를 운영하지 못하게 되어

우리 가족은 또다시 이사를 갑니다.


아마 또 빚쟁이들이 찾아와서 그랬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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