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빛아빠 Oct 23. 2022

02. 퇴근길

이 글은 창작 소설로 실존 인물이나 지명 등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나는 퇴근길을 좋아하면서도 싫어한다. 그 이유는 우리 회사가 서울의 중심 유흥가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30살이나 먹고도 나는 회사와 집 외에는 가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여가활동이란 무엇인가. 여가활동의 첫 글자 ‘여’는 남을 여(餘) 자다. 고로 여가활동이란 남는 시간을 자유롭게 쓰는 활동이다. 그렇다. 기본적으로 여가활동을 하려면 ‘시간’이라는 자본이 필요하다. 야근을 밥 먹듯 하는 나에겐 시간이 없다. 운이 좋아 정시 퇴근하여 시간이 있다면 여가활동을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간 미래의 힘을 너그럽게 대출해주던 나의 정신력과 체력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 나에게는 여가활동마저 사치가 되었다. 나의 퇴근길에 가득가득한 웃는 얼굴의 무리들을 볼 때면, 나는 해외 관광 와서 한껏 들뜬 외국 관광객들 사이에 홀로 존재하는 현지인이 된 느낌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도착하여 문이 열리고 로비로 들어서자 어둑어둑한 로비에 경비원 김 씨 아저씨가 듣는 라디오 소리만이 조그맣게 나를 반긴다. 늘 그렇듯 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목례를 하며 경비실을 지나간다. 김 씨 아저씨는 항상 무뚝뚝하게 목례하는 나를 바라만 본다. 그 바라보는 눈이 ‘이 늦은 시간까지 나가지 않고, 뭐하다 이제야 나가느냐.’라는 시선으로 느껴진다. 내가 원한 것도 아닌데 뭔가 억울하다. 매번 그 무뚝뚝한 시선이 어색하여 황망히 뒤로하고 출입구를 통과한다. 드디어 밖이다.

 6월 끝자락인데도 아직 밤공기는 제법 선선하다. 보고서 쓰느라 달아오른 나의 머리와 착잡한 나의 마음을 시원하게 가라앉혀주는 시원하고도 신선한 밤공기에 감사함을 느낀다. 잠시 발을 멈추어 열 번을 깊게 밤공기 냄새를 맡고 나니 기분이 살짝 전환되었다. 그러나 그나마도 잠시였다. ‘열한 번째 숨은 쉬지 말걸 하고 후회했다.’ 지나가던 검은 후드티를 뒤집어써 더욱 시꺼먼 세 놈이 길 한 복판을 당당히 걸으며 담배를 태우며 지나갔기 때문에 순식간에 나의 폐는 순수한 유독 가스로 가득 찼다. ‘신선한 밤공기마저 나에게는 사치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울적한 기분이 더욱 울적해져 여자 때문에 피우고 다른 여자 때문에 끊었던 담배가 다시 당기는 밤이다. 슬리퍼를 신지도 않았는데 발을 끌며 그 하얀 연기를 따라간다.

 몇 달 전 전철역 근처에 클럽이 새로 오픈하였다. 클럽 이름은 ‘The Housing’이었다. 궁금하여 검색해보니 ‘주택’이라는 뜻 아니면, ‘기계 부품을 덮는 단단한 덮개’라는 뜻인데 무슨 의미로 저런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붕어처럼 뻐끔 거리는 저 시꺼먼 세 놈은 그곳을 향하고 있으리라.

 “야 오늘 태식이 군대 가기 전 마지막 만나는 건데, 태식이 밀어줘야지?”

 세 놈 중, 키 작은놈이 가운데 놈을 몸으로 밀치면서 말했다.

 “그래 오늘 태식이 역사 한번 만들어줘야지!, 오늘 왠지 느낌 좋다!”

 세 놈 중, 키 큰 놈이 가운데 놈을 몸으로 밀치고 킥킥대며 말했다. 

 오늘의 주인공은 곧 군대에 입대하는 가운데 있는 태식이라는 놈인가 보다. 양 옆의 두 놈은 계속해서 가운데 있는 태식이라는 놈을 몸으로 밀치면서 떠들고 웃으며 기대에 부풀어 있다. 가운데 있는 태식이도 내심 기대하는 눈치다.

 전역 후 나는 누려 본 적도 없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클럽으로 향하는 놈들을 부러워하는 감정과 숨을 죽여 구경하며 뒤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역 근처에 도착했다. 새로 생긴 클럽 때문인지 요새 역 근처에 담배 피우는 젊은이들이 많다. 그 세 놈도 담배 피우는 젊은이들 사이로 사라진다.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쫓던 시선이 갑자기 아득해지며 멈춘다. 나의 멈춘 시선 끝에는 혼자 구석에서 담배 피우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검은색 루즈핏 티셔츠에 검은 가죽재킷을 한쪽은 제대로 입고, 한쪽은 팔뚝에 걸쳐 입었다. 그리고 검은색의 찢어진 스키니진을 입고, 검은색 스니커즈를 신어 온몸을 검은색으로 도배하고 그녀만의 시크한 매력을 더욱 끌어올려 풍기고 있었다. 언뜻 보기엔 다른 여자들과 차이가 없어 보이는 여자였는데, 보라색으로 염색한 똑 단발이 눈에 띄어 얼굴로 시선이 자연스레 옮겨졌다. 

 얼굴은 문자 그대로 주먹만 했고, 그녀가 내쉬는 담배 연기처럼 뽀얬다. 그 얼굴 중에 가장 넓은 공간을 눈이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다. 그 눈은 참 맑고도 농도 짙게 까매서 블랙홀을 연상케 했다. 블랙홀을 닮은 그 눈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리고 붉게 칠하고 담배 피우느라 야릇하게 벌어진 입술은 한국인의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두툼하고 커서 눈과 함께 고혹적인 분위기를 더하는 데 일조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한동안 고요하던 내 심장이 발작을 일으키더니 나의 혼이 그녀의 담배 연기와 함께 그녀의 눈과 입술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남정네들이 구미호에게 홀려 간을 내어주는 이유를 단번에 이해했다.

 그녀의 눈이 나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또 다른 방식으로 뜨끔하더니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시선만 멈춘 것뿐만 아니라 걸음도 멈춘 채로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그녀를 멍청하게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멍청한 시선을 알아챈 그녀는 무슨 일 있냐는 듯이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입을 크게 움직이며 또박또박 발음을 내는 시늉을 하였다. 그녀가 보내는 신호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 입술의 움직임을 읽으려 혼신의 힘을 다해 읽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왜요?’라고 묻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돌발행동에 너무 놀란 나는 달아올라 귀까지 벌게진 얼굴을 황급히 땅에 쳐 박고 전철역 에스컬레이터를 무려 두 계단씩 뛰어 내려갔다. 개찰구를 지나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오늘 여러모로 나의 심장이 수난을 겪는 날이다. 숨을 돌리고 다시 그녀를 떠올렸다. 원래라면 그녀의 입술을 읽고 다가가 말을 붙여야 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일과 박진태 부장에게 시달리고 막차 시간에 쫓기는 나에겐 그럴 시간도, 체력과 정신력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럴 만한 배짱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나는 쏟아져 나온 씁쓸함을 애써 다시 주워 담으며 전철에 올랐다.


 나는 JJ무역에 인턴으로 입사하던 시기부터 3년째 연애를 못하고 있다. 전에도 연애를 많이 해본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3학년 초부터 사귀다 내가 입대하고 100일이 지나자마자 바로 나를 차 버린 진희와 취업 준비 시절 같이 아르바이트하며 동병상련에 눈이 맞아 사귀었다가 내가 인턴 생활 시작한 후로 자연스레 멀어져 헤어지게 된 은영이가 전부였다. 연애 횟수는 적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이 두 번의 연애경험은 아주 귀중한 경험이었다. 이 두 번의 귀중한 경험만으로도 나는 어느 정도 연애를 깨우쳤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가 연애를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아무리 얼굴이 예뻐도 나와 결이 다른 여자는 만날 수 없다는 나름 확고한 연애관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숙맥이라 새로운 사람과 자연스럽고 빠르게 가까워지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사실 두 번째 이유가 더 크다. 첫 번째 이유는 미인을 차지할 만한 배짱도 없고, 굉장한 미인이 나를 먼저 좋아할 리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나의 마음이 만들어 낸 정신승리를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실상은 연애를 해보려고 노력해도 소개팅에 나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 거리기 일쑤인 나의 내성적 성향 때문에 상대가 나를 남자로 느끼지 못하였고,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여 사내 연애를 해보려고 해도 마음에 드는 친구들은 이미 다 임자가 있었다. 인턴 시절에는 유튜브나 책으로 새로운 사람 만나는 법을 공부라도 했지만, 요새는 사랑도 연애도 다 귀찮아져 버렸다. 그저 아까 그녀처럼 고혹적인 여성이 먼저 다가와 쉬운 하룻밤 사랑을 나누는 꿈같은 일이 나에게도 벌어지기를 바라는 헛된 욕망만 남았다.


 씁쓸함을 줍다 보니 어느새 저렴한 집값을 자랑하는 서울 외곽의 우리 동네에 도착했다.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보니 어느덧 하루가 지난 00시 52분이었다. 어제 여러모로 고생한 심장을 달래기 위해 역 앞의 편의점에서 조각 치킨과 맥주를 하나씩 사들고 저렴하고 좁기만 한 집에 들어간다.


이전 01화 01. 금요일 17시 55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