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창작 소설로 실존 인물이나 지명 등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09시 30분이 되어도 아무 호출이 없어 내가 먼저 박진태 부장의 자리로 찾아갔다. ‘딱, 딱.’ 경쾌하지만 듣기 싫은 탁발음이 들린다. 가볍게 노크를 하고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내민다. 박진태 부장은 월요일 아침부터 안경을 콧잔등에 얹은 채로 손톱을 깎으며 심드렁하게 눈만 움직여 치켜뜨며 나를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부장님, 금요일 늦게 제가 메일로 보고서 보냈는데 보셨나요?”
박진태 부장은 심드렁하게 한 손으로 안경을 벗어던지고, 깎여 떨어진 손톱을 휙 쓸어 바닥에 떨어뜨리며 내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대답한다.
“아ㆍㆍ. 그거. 주말에 생각해보니 급하게 서두를 필요 없겠더라고. 예정대로 화요일에 검토하지.”
‘이런 개 상놈의 새끼. 맨날 이런 식이지. 몇 번째냐?’ 역시나 속으로는 쌍욕을 하지만 상대하기 싫어 대답도 않고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돌아선다.
“근데, 자네 아침에 상사를 보면 인사를 좀 하지 그러나?”
돌아선 내 뒤통수에 박진태 부장이 입으로 가볍게 비수 몇 개를 날린다.
나도‘상사가 상사 다우면 먼저 인사를 하겠죠?’라고 응수하고 싶지만, 부글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걸음을 이내 멈추고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그저 무미건조하게 짧은 대답을 남기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뒤통수가 따가운 건 내 기분 탓인지, 박진태 부장이 진짜 나를 노려보느라 그런 건지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 그냥 흠신 두들겨 패고 피떡이 된 얼굴에 사표를 던지고 싶은 기분이다.
박진태 부장은 내가 정직원이 되어 영업 3팀에 발령받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왠지 모르게 나를 싫어하는 티를 팍팍 냈다. 처음 나를 봤을 때부터 내 외모를 가지고 딴죽을 걸었다.
“자네는 돈이 없나? 왜 그렇게 바지가 짧지? 내가 돈 좀 보태줘?”
9부 슬랙스를 입은 나를 보고 처음 꺼낸 말이었다. 함께 일한 지 6개월이 됐을 쯤에는 5년 넘게 유지하고 있는 나의 투 블록 헤어스타일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왜 그렇게 옆머리를 짧게 하고 다니지? 그렇게 옆머리를 하얗게 하고 다니면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어이가 없었다. 황용명 대리도 투 블록인데, 내 머리만 혐오스럽다는 말인가? 지는 소갈머리 없는 대머리인 주제에 누가 누구한테 혐오감을 논하는지. 웃으며 넘기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박진태 부장을 나의 주적으로 상정했지만, 내가 반격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이래서 화병이 유행하나 보다.
그리고 나날이 나를 괴롭히는 수법이 진화한 박진태 부장은 요새 더욱 악랄해져서 저번 금요일처럼 퇴근 3분 남기고 지시 내린 후 퇴근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느긋하게 일을 진행하는 수법으로 나를 못 살게 굴고 있다.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 없어질 전쟁이다. 아니 괴롭힘이다.
자리에 앉아 심호흡을 하며 심신의 평안을 도모하는데 불쑥 황용명 대리가 얼굴을 들이민다.
“현석 씨 금요일에 엄청 늦게 퇴근했다며? 퇴근 전에 갑자기 부장님이 보고서 제출하라고 한 거지?”
“네.”
“그리고 방금 또 예정대로 화요일부터 진행한다고 하시지?”
“네.”
“아휴. 부장님도 참 맨날 이랬다 저랬다 하신단 말이야.”
누가 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는다고 했던가. 누가 들을까 작은 소리로 이것저것 물으며 배실배실 웃는 그 얼굴에 침을 큰 소리를 내며 ‘퉤!’하고 뱉고 싶다. 원래대로라면 황용명 대리가 자료를 정리하여 나에게 넘겨줬어야 했다. 황용명 대리에게 넘겨받은 그 자료를 취합하여 내가 보고서를 꾸리기로 회의 때 말을 맞췄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요일 내가 박진태 부장에게 메일을 받고 이야기를 꺼내려고 고개를 들자마자 황용명 대리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내가 자신의 일까지 다 처리해줬는데 ‘고생했다. 고맙다.’ 이런 말 한마디 안 하는 것이 굉장히 얄밉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입이라도 다물고 모르는 척했으면 덜 얄미울 텐데, 다 알면서도 굳이 나에게 와 확인 사살하는 황용명 대리 덕분에 속이 더욱 끓어오른다. 그런데 옆에서 또 휘발유를 붓는 소리가 날아왔다.
“회사원은 까라면 까는 거야. 그렇게 넙죽 엎드려 시키는 대로 해야 밥값을 하는 거지.”
만년 과장인 변진수 과장이 옆에서 개소리를 지껄였다. 기가 찼다. 제일 밥값 못하는 사람이 저런 말을 하다니. ‘그런 말은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에요. 그런 말을 하기 전에는 꼭 자신을 돌아보셔야 해요. 그러니깐 내 말은 남한테 신경 끄고 제발 본인 앞가림이나 좀 잘하라는 말이에요.’하고 나야말로 진심으로 조언해주고 싶었다.
“아~! 역시 변진수 과장님. 지당하십니다.”
‘지당이 아니라 지랄이겠지.’ 오늘 아침부터 다들 왜 이러나 모르겠다. 다들 약을 쳐드셨나.
“거기~. 다들 자리로 돌아가 일에 집중하시죠?”
“네~.”
역시 김현수 차장님이다. 대충 공기의 흐름을 읽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바로 정리해주신다. 김현수 차장님 한 마디에 황용명 대리가 갑자기 차분하게 대답을 하고 자리로 돌아간다. 이제야 파티션으로 막힌 3면에 최대한 머리를 밀어 넣고 파고들어 정신을 가다듬는다.
‘이번 계약건만 잘 따내면 떠날 수 있다. 정신 팔지 말고 집중하자. 집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