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빛아빠 Oct 23. 2022

10. 시원하다

이 글은 창작 소설로 실존 인물이나 지명 등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들어와.”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놈이 여전히 배실배실 웃으며 대답한다. 

 “투룸이라더니 방 한가운데에 중문 달린 거 말곤 별 거 없네?” 놈이 나의 저렴하고 좁기만 한 집에 들어오며 스윽 둘러보더니 내가 묻지도 않은 감상평을 제멋대로 읊었다. 

 “여기 앉아.” 내가 침대 맡에 자연스럽게 앉으며 놈의 앉을자리를 지정해줬다. 놈은 나의 저렴하고 좁은 집이 신기하다는 듯이 둘러보며 별 의심 없이 자리에 앉았다.

 “치킨무의 물 좀 버리고 올게.”

 “그래. 누가 먹는다고.” 놈은 내가 하는 말마다 말장구를 친다. 저 놈의 입은 쉬는 법을 모르나 보다. 치킨무의 물을 버리고 돌아와 앉아 맥주부터 땄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놈의 잔을 채워줬다. 웬일로 잔을 받는 놈은 조용히 두 손으로 공손히 맥주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아무 말 없이 치킨 포장 박스를 개봉했다. 그런데 내가 개봉하자마자 권하지도 않았는데 놈은 해맑게 웃으며 닭다리 하나를 집어 들고는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놈은 내 앞으로 맥주잔을 내밀며 “짠!”이라고 짧게 소리 내어 말했다. 말하는 놈의 얼굴을 보아하니 이 상황이 적잖이 즐거운 모양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가 되지 않고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일단 놈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마음먹었으니 그냥 소리 없이 놈의 맥주잔에 나의 맥주잔을 부딪쳐 주었다. 그리고 둘 다 말없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제야 놈이 말을 꺼냈다.

 “까먹었을까 봐 다시 말해주는데 나는 최우영이야.”

 “안 궁금해. 그냥 조용히 치킨이랑 맥주나 먹고 얼른 가라.”

 “원래 누가 자기소개를 하면, 안 궁금하다고 대답하는 게 아니라 소개를 들은 본인도 자신이 누군지 소개해야 하는 거야. 부모님이 그렇게 가르쳤나?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함께 치맥 먹는 사이인데 이름 정도는 알려줄 수 있잖아? 계속 개새끼라고 부를 수도 없고. 또 조용히 먹는 건 나랑 안 맞아.” 

 놈이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참으로 어이가 없어 다시 골머리가 아려왔다. 특히 저 “부모님이 그렇게 가르쳤나?” 하고 공격하는 말은 분명 저번에 내가 했던 공격에 대한 복수일 터다. 절로 한숨이 올라왔다. 올라온 한숨을 참을 이유도 없어 그냥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놈의 말대로 여기까지 와서 함께 치맥을 먹는데 조용히 먹는 것도 나에게는 큰 이득이 없을 거 같다. 적당히 어울려주며 나에게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그 의중을 캐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차현석이다. 근데 너 몇 살이냐?”

 “나? 26살.”

 대답 하나하나가 골머리를 아려온다. 4살이나 어린놈이 나에게 따박따박 반말하고 욕까지 했단 말인가.

 “야. 나 30살이니까. 형이라 하고 존댓말로 해.”

 “싫어. 난 살면서 형이라 부르는 사람 한 명도 없었는데. 뭐 사회 나오면 위아래로 5살까지 친구라던데 그냥 친구해.”

 기가 막힌다는 걸 온몸으로 체감하게 해주는 대답이었다. 어쩜 이렇게까지 뻔뻔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말은 손해 보는 사람이 넓은 아량을 베풀며 하는 말이지. 손해 볼 거 하나 없는 놈이 할 말이 아니다.

 “알았어. 그럼 현석이 형이나 현석 씨는 오글거리니깐 그냥 현석 쓰 정도로 마무리하자. 끝! 탕탕탕!”

 또 놈이 판결을 내리듯 한 손으로 다른 한 손을 내리치며 제 멋대로 정해버렸다. 현석 쓰로 제 멋대로 마무리 짓는 건 또 뭐며, 오글거리는 건 또 뭔지 나와는 아예 다른 종족 같이 느껴지고 놈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놈과 자리에 앉아 겨우 맥주 한 잔 마셨을 뿐인데 벌써 따지고 들 기력도 없다.

 “하아ㆍㆍㆍ. 알았다. 어차피 치맥 끝날 때까지만 참으면 되니깐 그냥 호칭은 네 맘대로 하기로 하고. 그럼 너는 왜 나한테 처음 보자마자 욕한 거야?”

 “아! 그거? 현석 쓰는 처음 나를 본 날 나한테 비키라고 욕하고 싶지 않았어? 근데 나한테 한 마디도 못하고 그냥 조용히 나랑 난간 사이로 몸을 비집고 지나가려 했잖아. 그게 개새끼지 뭐야?”

 “그러니깐 겨우 네가 보기에 내가 개새끼인 거 같아서 나한테 개새끼라고 했다고?”

 “어. 나는 생각나는 대로 표현하는 편이야. 짠!”

 놈은 웃으며 또 나에게 잔을 내밀었다. 놈이 내게 욕한 이유가 너무도 터무니없는 이유라 속에서 열불이 터져 또 자동적으로 턱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대로 이를 악 문 채로 놈의 잔에 거칠게 나의 잔을 부딪친 후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놈은 내가 열이 올라 턱이 한껏 튀어나온 채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것이 재미있었는지 연신 웃으며 내가 다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 것까지 지켜보고는 자기는 홀짝 한 모금만 마셨다. 

 “야. 네가 그렇게 느꼈다고 해서 그렇게 무턱대고 남에게 개새끼라고 하면 안 되지.” 

 “맞아. 근데 아까 말했듯이 나는 생각나는 대로 표현하는 편이야. 하고 싶은 말 쌓아두면 병나. 화병. 안 돼.” 놈이 손을 휘휘 저으며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욕이 나쁘기만 하다고 생각 안 해. 물론 남을 비난하기 위해 하는 욕은 나쁘고 문제를 일으키겠지만, 분명 나쁜 것이라도 세상 모든 것에 순기능이 있어. 욕은 내 분노를 표출하는 하나의 수단일 수 있다는 거지. 욕을 하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 쌓여 있던 많은 것을 해소할 수 있어. 그 예로 현석 쓰는 줄곧 내가 개새끼라 하는 것을 욕설이라고 돌려서 표현했는데, 방금 나눈 대화에서는 처음으로 개새끼라고 직접적으로 뱉어냈어. 그렇다고 제대로 욕을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속 시원하게 뱉어내니깐 속이 좀 뚫리는 기분이 들지 않았어?” 갑자기 놈이 다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예리한 눈빛을 띄며 나를 직시하며 물었다.

 오래, 또 자주 보지는 않았지만 놈은 한창 미쳐있다가도 한 번씩 예리하다. 저번에 경찰의 대응에 대해 예견할 때도 그렇게 예리했다. 그리고 나름 명확한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놈 같다. 특히 욕에 대한 가치관. 그런데 그 가치관이 쓸데없고 미쳐있는 게 문제인 거 같다. 아무튼 종잡을 수 없는 놈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놈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나는 학창 시절에 거침없이 욕을 뱉어내다 군대 전역 후로는 욕 한 번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거의 8년 만에 개새끼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입 밖으로 뱉어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 속이 가라앉은 것이 개새끼라는 단어를 욕설이라 돌려 말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뱉어내서인지, 차가운 맥주가 내 안의 열불을 잡아준 건지는 확신할 수 없어 놈의 마지막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아! 그리고 내가 현석 쓰한테 욕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한참 놈의 마지막 물음에 대답을 못하고 생각만 하고 있던 중에 나를 지켜보던 놈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내게 던진 말에 의식이 절로 놈에게 향하였다.

 “뭔데?”

 “내가 보기엔 현석 쓰한테는 욕해도 될 거 같았어.”

 아ㆍㆍㆍ. 이건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ㆍㆍㆍ. 놈의 대답에 뒷골이 확 당겼다. 이놈은 세 치 혀로 나의 혈압을 조종하여 나를 죽이려는 게 확실하다. 놈과 대화하면 내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거 같이 격변하게 된다.

 “아니, 그게 뭔 말 같잖은 소리야?” 이를 꽉 물고 뒷골을 잡은 채로 내가 되물었다. 

 “아니. 화내지 말고. 내가 오며 가며 현석 쓰를 몇 번 봤는데. 항상 어깨가 축 처져가지고 집이랑 회사만 다니는 거 같더라고. 항상 찌들어가지고. 친구도 없어 보이고. 그 모습을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현석 쓰에게 측은지심이 들더라고. 그러다 어느 순간 현석 쓰가 내 친구가 된 거 같더라고. 그래서 편의점 계단 앞에서 직접 마주친 그날 자연스럽게 욕이 나왔지 뭐야. 원래 친한 친구끼리 욕도 하고 그러잖아. 짠!” 

 녀석이 또 배실배실 웃는 얼굴로 너스레를 떨며 잔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이번에도 말없이 녀석의 잔에 내 잔을 부딪쳤지만, 벌컥벌컥 마시지 않고 놈의 대답을 곱씹으며 크게 한 모금만 마셨다. 놈은 나를 지켜보니 내가 회사와 집만 다니고, 친구도 없는 거 같아 내게 측은지심이 들었다고 하는데ㆍㆍㆍ. 뭔가 돌려 까며 나를 조롱하는 느낌도 있는 거 같았다. 아무튼 내게 측은지심이 들고 친구같이 여겨져 욕을 했다는 건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놈이 전에 ‘오늘은’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이해가 되었다. 같은 동네, 같은 건물에 살다 보니 오고 가는 나를 봤던 모양이다. 의도적으로 스토킹을 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궁금증이 하나 해결되자 다른 궁금증이 다시 올라왔다.

 “그럼 나한테 치맥 하자고 요구한 이유는 뭐야?” 

 “그건 단순해. 현석 쓰랑 친해지고 싶었거든. 그리고 난 돈도 없고 친구도 없어.” 녀석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대답을 했다. 

 한 치의 거리낌 없는 듯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방금 측은지심에 대한 말이 나를 돌려 까는 것은 아닌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냥 제가 느낀 사실 그대로 진술한 것이리라. 확실히 생각나는 대로 말과 행동을 출력하는 순수하게 1차원적인 놈인 거 같다. 놈은 대답을 마치고 바로 맥주를 들어 공손히 두 손으로 나의 잔을 채워주려 했다. 그 모습에 나도 습관적으로 공손하게 두 손으로 잔을 받았다. 갑자기 공손해진 나의 모습을 보더니 놈은 갑자기 음흉하게 웃으며 잔을 채워줬다. 녀석의 음흉한 미소에 순간적으로 아차 싶더니 이를 꽉 물게 되었다.

 “이제 어느 정도 궁금증이 다 해소됐나? 이제 나도 좀 물어봐도 되나?” 놈이 자신의 잔도 손수 채운 후 나에게 질문을 하였다.

 “뭔데?” 

 놈이 나에게 궁금할 게 뭐가 있는지 의아한 것도 잠시 곧바로 수그러들었던 경계심이 올라왔다.

 “뭐긴 그냥 서로 좀 알아보자는 거지. 현석 쓰는 회사원 같던데 무슨 일을 해?”

 “나는 작은 무역회사 다니고 있어.” 

 “무역회사? 무슨 무역회사?”

 “JJ 무역이라고, 그냥 이것저것 돈 되면 다 취급하는 곳이야.”

 “푸하하핫. 그게 뭐야? 고추 회사야?  JJ 무역이라니. 무슨 약자가 그래?”

 놈은 우리 회사 이름이 뭐가 그리 웃긴지 연신 킥킥대며 놀려댔다. 별 거 아닌 일에도 신나서 웃는 것과 사고방식을 보면 놈의 정신연령은 사춘기 수준에 머물러 있는 거 같다. 사실 나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입 밖으로 꺼낸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니ㆍㆍㆍ. 고추 회사가 아니라ㆍㆍㆍ. 초대 회장 이름이 남중종이래. 그래서 JJ 무역이라 이름 지은 거야.” 놈에게 휘둘리지 않으려고 차분히 대답을 하고 있지만, 내가 왜 굳이 이걸 놈에게 해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살짝 짜증이 올라와 맥주를 또 두 모금 들이켰다.

 “그래서 너는 뭐하는 놈인데?” 애사심이 깊지는 않지만, 놈이 자꾸 회사 이름으로 놀려대니 ‘너는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심보가 올라왔다. 그래서 내가 턱을 한껏 치켜올리며 놈에게 물어봤다.

 “나? 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데. 그러니깐 친구도 없고, 돈도 없지.” 놈이 해맑게 치킨을 뜯어먹으며 대답했다. 

 “근데 현석 쓰는 그 회사 왜 들어간 거야? 꿈이 무역회사 직원이었어?” 대답을 하고는 놈은 자신이 무직인 건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천진난만하게 제가 궁금한 것을 또 물어봤다.

 “아니. 꿈은 모르겠고. 그냥 형편 되는 대로 들어간 거지.” 대답을 하고 보니 내 기분이 참 씁쓸해졌다.

 “그래서 회사 다니는 게 행복해?” 놈이 제법 진지하게 물어봤다.

 “회사 다니는 게 행복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그냥 돈 벌러 다니는 거지.” 아무것도 안 하는 어린놈이 사회생활을 뭘 알겠냐는 듯이 내가 대답했다.

 “그러면 안 되지!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몰라?” 놈은 갑자기 답답하다는 듯이 나에게 따져 물었다. 이놈은 뭐 대화나 상황, 감정 등에 맥락이 없다.

 “야. 네가 나한테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어이가 없다는 표현도 이제 질릴 정도다. 진이 빠질 대로 빠져 자연스레 벌어진 입을 그대로 둔 채로 내가 되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도망치지도 않고 있어!” 놈은 득의양양한 듯이 가슴을 펴 보이며 대답하고 바로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빨리 진로와 적성 찾는 것을 포기하는 경향이 있어. 내가 봤을 때는 한 40대까지는 여유롭게 천천히 자신의 진로와 적성을 찾아야 맞아.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누가 30살 넘어서 프랑스로 제빵 기술 배우러 갔대. 그런데 자기가 제일 나이 많을 줄 알았는데 실제로 가보니 자기가 햇병아리였다는 거야. 40대가 제일 많았대. 그리고 성공한 사업가들도 대부분이 대기만성 형 인간이라고. 넷플릭스나 인텔의 창업자도 다 30대나 40대에 사업에 도전했다고 하잖아. 그런데 현석 쓰는 너무 자신을 빨리 포기해버린 거야!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지!”놈이 뻔뻔하게 두 번째 닭다리를 든 채로 열변을 토하였다. 놈에게는 두 명이서 치킨을 먹을 때 닭다리를 하나씩 나눠 먹는다는 상식도 없는가 보다. 

 그 상식 없는 놈이 들은 예시는 나도 어디서 들어봄직한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왜 처음 보는 무직인 4살이나 어린놈에게 이런 설교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따지기가 거북스러웠다. 놈의 열변에 살짝 기가 눌렸기 때문이다.

 “현석 쓰는 원래 꿈이 뭐였는데?” 놈이 살짝 기가 눌려 있는 내게 쉴 틈을 주지 않고 물었다. 나는 놈과의 대화가 너무 버거워 잠시 쉬어가기 위해 남은 맥주를 마저 다 비웠다. 그러고는 허공을 보며 잠시 나를 돌아봤다. 그러다 내 꿈이 뭐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쎄ㆍㆍㆍ.” 내 꿈이 뭐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자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의식이 흐려진 채로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이것 봐! 지금 현석 쓰 지금 굉장히 심각한 상태네!”한참을 노려보며 웅크린 채로 기다리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단번에 날아올라 사냥감의 목을 물고 늘어지는 늑대처럼 놈은 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내가 심각한 상태라니ㆍㆍㆍ?” 놈의 말에 불쑥 위화감이 올라와 되물었다. 

 사실 나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나는 매일 무료하고 힘든 일상을 보내는 것을 모른 척하고 그저 버티고만 있었다. 애써 모른 척하며 버티는 중인데 놈이 지금 그걸 건드리고 있다. 

 “그래! 꿈이 없으면 죽은 거나 다름없는 거지! 예를 들면 현석 쓰는 지금 닭이 된 거야! 닭! 닭이 되면 뭔 줄 알아? 장성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면서 늙어가고 썩어가고 있는 거야! 그러니깐 다른 목표를 찾아서 다시 알을 깨고 나와 병아리가 되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렇게 항상 도전해야만 하는 거라고!” 놈이 강론을 펼치는 열정적인 교수가 된 것처럼 연기하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는 비어 있는 내 맥주잔에 잔을 채워주려고 했다.

 “아냐. 난 이제 됐어. 난 술이 좀 약한 편이라 내 주량은 여기까지야. 더 먹으면 힘들 거야.” 내가 황망히 거절의 의사를 표시하자 놈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격을 가했다.

 “이것 봐!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아직도 닭인 상태잖아! 언제 거하게 취해봤어? 맨날 똑같은 양만 마시고 말 거야? 어차피 내일 토요일이라 출근도 안 하잖아? 이런 것도 알을 깨는 과정인 거야!”

 놈의 말이 맞다. 나는 군 입대 후로 거하게 취해본 적이 없다. 그렇게 나는 점점 놈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 기세에 홀려 멍청하게 손을 내밀어 놈에게 맥주를 받았다.

 “축하해! 벌써 알을 하나 깼어! 짠!” 놈이 만족한 듯이 웃으며 잔을 내밀며 말했다. 갑자기 칭찬하며 웃는 놈의 얼굴에 나도 헛웃음이 흘러나오며 놈의 잔에 나의 잔을 부딪치고 두 모금 정도 마셨다. 바로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라온다.

 “근데 그러는 너는 꿈이 있어?” 취기와 함께 올라온 나의 궁금증을 놈에게 던져봤다.

 “없어.” 놈이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얘는 뭐 맨날 대답이 예상 범위 밖이다.

 “그래서 난 도망치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거지. 지금은 계속 꿈을 찾는 과정인 거야.” 어이없어하는 나의 얼굴을 보며 놈이 더욱 당당하게 대답하며 외쳤다.

 “혹시, 너 부잣집 아들 아냐?” 내가 다시 의혹을 제기했다. 26살이나 먹고 꿈 타령하는 놈이라면 부잣집 아들이나 되어야 할 수 있는 말 같았다.

 “말했듯이 현재 나는 아무것도 안 하기에 돈도 없고, 친구도 없어. 우리 집이 부모님을 부양해야 할 수준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꽤 빠듯한 집이야. 그래서 나도 이것저것 잡일 하면서 버티고 있는 거고. 그래서 나도 여유가 없으니 이렇게 현석 쓰한테 치맥을 얻어먹고 있지. 그리고 부잣집 아들이면 이런 저렴하기만 한 집에 들어올 이유가 없겠지?” 놈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나의 의혹을 눌러 집어넣었다. 그 반론을 듣고 보니 부잣집 아들은 아닌 게 맞는 거 같다. 오히려 나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또 나는 쉽게 놈의 말을 수긍하며 나는 맥주를 한 모금 크게 마셨다.

 “근데 현석 쓰는 회사 다니는 게 왜 행복하지 않은데?” 놈이 이번에는 자기 차례라는 듯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글쎄ㆍㆍㆍ. 네 말대로 도망친 곳이 낙원이 아니었나 보지.” 놈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그저 맥주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씁쓸하게 웃으며 놈의 질문에 대답하고 다시 맥주를 한 모금 크게 마셨다.

 “에헤이! 또 에둘러서 말하네. 괴롭히는 사람이라도 있나 보지?” 놈이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어봤다. 저놈은 진짜 한 번씩 굉장히 예리하다. 나는 갑자기 열받게 하는 얼굴이 떠올라 남은 맥주를 단번에 다 비웠다. 놈이 말없이 다시 나의 잔을 채워준다. 

 “나한테 회사생활이라는 게 일 자체보다는 인간관계가 훨씬 더 힘들더라고. 부장이 좀 짜증 나게 굴지.” 다시 맥주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씁쓸하게 대답했다.

 “왜? 뭐 어떻게 괴롭히는데?” 놈이 사뭇 걱정하는 목소리로 물어봤다.

 한 번도 누군가에게 직장 상사의 뒷담화를 해본 적이 없어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아! 뭐 어때? 나는 거기 회사 사람도 아닌데. 없을 땐 나라님도 욕한다잖아. 그리고 누군가를 뒷담화하는 것만으로도 쌓인 게 풀리는 효과도 있어. 나 믿고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봐!”

 놈을 믿을 것까진 없지만 취기도 오르고 놈은 우리 회사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니 뭐 어떠냐 싶어 크게 한숨을 쉬고 나는 묵혀두었던 이야기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정직원이 되어 박진태 부장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9부 바지를 보고 내게 시비 걸었던 일, 대머리인 주제에 나의 투 블록 머리를 혐오스럽다며 내게 시비 건 일과 요새는 더 악랄해져서 천천히 해도 될 일을 퇴근 5분 전에 당일 내로 처리할 것을 요구하며 괴롭히는 일 등 박진태 부장에게 당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털어놓고 남은 맥주를 다 비웠다. 놈은 쉬지 않던 입을 다물고 진지하게 나의 말을 듣더니 조용하게 위로의 맥주를 따라주고는 적막을 깼다.

 “그 박진태라는 부장 놈 개새끼네!”

 그동안 혼자 속으로 앓고 있던 걸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털어놓아서인지, 놈이 한결같은 단어를 선택하며 내 대신 욕을 해주어서인지, 아니면 내가 취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놈의 적막을 깨고 꺼낸 말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맞네. 개새끼.” 내가 편해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음 보인 나의 편해진 미소가 마음에 들었는지 놈이 뿌듯하게 미소를 띠며 외쳤다.

 “박진태! 개새끼!” 

 “박진태! 개새끼!” 내가 웃으며 더 크게 따라 외쳤다. 

 “짠!” 이번에는 동시에 외치며 서로 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크게 한 모금 마셨는데 그 한 모금이 내 주량을 크게 초과하였는지 갑자기 속에 있는 것들이 더는 못 버티겠다며 아우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급하게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어가 내 속에 있는 것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게워내고 나니 속도 마음도 편해졌다. 


 위장과 마음속의 것들을 맘껏 비워 내고 나니 꽤 후련해졌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보니 놈이 일어서서 내 방을 뒤지고 있었다.

 “야 뭐해? 왜 남의 방을 막 뒤져?”

 얘는 꼭 마음에 드려하다가도 방심할 수 없는 돌발 행동을 한다.

 “아! 담배 피우려는데 라이터가 없어.” 놈은 나를 신경도 쓰지 않고 대답하며 나의 TV 선반 아래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내가 정말 힘들 때 피우려고 넣어 둔 담배와 라이터가 있었다.

 “찾았다! 담배 한 대 피우러 가자!” 놈이 보물이라도 찾은 듯이 기뻐하며 나에게 말했다.

 “아냐. 나 담배 끊었어. 너 혼자 다녀와.” 나는 손을 들어 사양하는 손짓을 취하며 거절했다.

 “아! 심심해! 그냥 일단 같이 가!” 놈이 억지를 부리며 내 팔을 끌고 1층으로 데리고 갔다. 1층 현관을 통해 밖으로 나오자 꽤 선선하고도 굉장히 습한 공기가 정신을 차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거 같았다. 오늘 아침 알람으로 상냥하지만 짜증 나는 AI가 분명 화창할 거라고 했는데 아마 오늘도 기상청의 일기예보는 또 틀릴 모양이다. 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담뱃불을 댕기고는 크게 들이쉬고 다시 하늘을 향해 내뱉었다. 놈이 피우는 담배를 보니 오늘따라 담배가 굉장히 맛있게 보인다.

 “그거 알지? 군대에서 전술훈련 중이라 며칠 동안 담배 못 피우다가 복귀하고 바로 흡연장 가서 담배 피우면 겁나 맛있는 거?” 놈이 황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놈은 분명 지금 나를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더니 다시 깊게 담배연기를 들이켜고 다시 하늘을 향하여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오늘 알을 하나 더 깨 보시지?” 놈이 내가 숨겨두었던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살짝 꺼낸 채로 내게 내밀며 말을 했다. 나는 괜히 취한 탓과 놈의 권유 탓으로 돌리며 마지못해 피우는 척 한 개비를 잡아들고 불을 댕겼다. 그리고 길게 한 숨 빨아들이고 크게 하늘을 향해 내뿜었다. 그러자 바로 몸이 반응을 하였다. 긴장된 근육이 쫙 풀리고, 마음이 착 가라앉으며, 맥주의 알딸딸함에 담배의 어지러움이 추가된 유독물질의 폭탄주가 나의 뇌를 휘감았다. 이건 내가 그동안 피웠던 담배 중 가장 맛있는 담배다. 한 동안 우리는 말없이 길게 들이쉬고 내 쉬며 하얀 연기를 가지고 놀았다. 그러다 갑자기 대야로 퍼붓듯이 세찬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역시 기상청이 또 틀렸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었다. 얼마 만에 취하고, 얼마 만에 담배를 피우고, 얼마 만에 퍼붓는 비를 맞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 세 가지를 하루에 한꺼번에 해본 날이 나에게 있었던가? 얼굴에 떨어지는 이 비가! 순식간에 내 몸을 적시는 이 비가! 너무 시원하다! 내 안의 모든 부정을 씻어주는 것 같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환희가 넘쳐흐르기 시작하며 더없이 편안하고 전혀 꾸밈이 없는 미소가 오랜만에 나의 얼굴에 번졌다.

 “맛있지?” 놈이 내 얼굴의 그 편안한 미소를 보고는 흐뭇해하며 내게 물었다.

 “어. 맛있다.” 내가 편안한 미소를 느긋하게 즐기며 대답했다.

 “시원하지?” 놈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묻는다.

 “어! 엄청 시원하다!” 내 안의 넘치는 환희를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렸다.


이전 09화 09. 한 주의 마무리는 치맥이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