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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아빠 Oct 23. 2022

08. 계속 주위를 맴도는 뻔뻔한 놈

이 글은 창작 소설로 실존 인물이나 지명 등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자, 오늘은 이만 정리하시죠.”

 김현수 차장님이 아주 좋은 말씀을 하신다. 어제 잡무를 웬만큼 다 정리해서인지 오늘은 다들 정시퇴근을 할 수 있었다. 운도 좋고, 기분도 좋은 날이다. 집에 가서 딱히 할 일은 없지만, 집에 가서 누울 수 있다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좋다. 타다 남은 장작 같이 매사에 의욕이 없는 변진수 과장마저 지금만은 싱글벙글 미소를 머금고 있다. 정시퇴근의 힘은 정말 강력하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밀린 주문을 처리하는 것처럼 나의 손은 그 어느 때보다 빨라졌고, 한 치의 낭비도 허락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컴퓨터 전원을 내리고, 책상을 정리한 후 가방을 싸고 나니 컴퓨터 모니터가 까매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하고 후다닥 나가는데 뒤에서 황용명 대리가 나를 방해한다.

 “어디 좋은 데 가나 봐? 되게 바쁘네?”

 저놈의 참견질은 언제 그만둘는지 모르겠다. 

 “네ㆍㆍㆍ. 뭐ㆍㆍㆍ.”

 대충 얼버무리며 대답을 하고, 집 앞 편의점의 조각 치킨과 맥주, 그리고 나의 사랑스러운 저렴하고 좁은 집을 향해 내달린다. 정시 퇴근하는 날만큼은 나도 모르게 무림의 고수가 된다. 경공이라도 펼치는 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날아올라 앞에 꾸물대는 사람들을 모두 제치고 전철 승강장 맨 앞에 선다. 전철이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리자마자 올라탄다. 맨 앞에 섰기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그 특권은 무려 앉아서 가기. 무채색의 회색 얼굴들로 빼곡한 전철에서 나만의 공간이 생기니 너무 안락하다. 이런 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지. 행복감을 더욱 끌어올리기 위해 편하게 뒤로 기대어 앉아 인스타그램으로 운동하는 여자들 피드를 훔쳐보며 혼자만 설레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어느덧 내가 내릴 역에 도착했다. 오면서 행복감을 만끽하고 충전했으니, 역 앞 편의점에서 조각 치킨과 맥주를 사서 기분 좋을 때마다 사랑스러운 나의 저렴하고 좁은 집에 들어가 배를 채우고 허송세월을 보내야 한다. 보잘것없지만 나에게는 완벽한 하루의 마무리를 기대하며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왔다. 그러나 역 앞 편의점이 눈에 들어온 순간 기분이 더러워졌다. 하늘은 나를 버렸다. 어제 그놈이 심플한 검은색 반바지와 검은 바탕에 금색으로 자수가 놓인 화려한 셔츠의 긴소매를 대충 두 번 접어 입고, 어제와 같은 자리에서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하나 확신이 생겼다. 저놈은 확실히 직장인은 아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어제와 같은 자리에서 길을 막고 담배 피우고 있는 놈을 보자마자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오고, 서글서글하던 눈에 힘이 들어가고, 자동으로 아래턱이 튀어나왔다.

 ‘다른 편의점을 뚫어야 하나ㆍㆍㆍ. 아니지. 내가 왜 저런 양아치 때문에 내 단골 편의점을 버리고 멀리 돌아다녀야 하지?’

 놈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당당히 편의점으로 들어가기로 했지만, 오늘도 놈과 난간 사이의 공간을 눈으로 재며 편의점 계단으로 걸어갔다.

 “엇! 어제 그 개새끼네?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

 ‘하아ㆍㆍㆍ. 또 개새끼라니ㆍㆍㆍ.’ 하마터면 놈에게 눈길을 줄 뻔했다. ‘아니야!’ 다시 정신을 바로 잡고 저 미친놈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아예 무시하기로 다시 마음을 다진다. 오늘은 어제처럼 편의점 문을 열며 슬쩍 보는 것도 하지 않는다. 평소대로 조각 치킨과 맥주를 들고 계산대에서 계산을 한다.

 “4,800원입니다.”

 늘 하던 대로 생각 없이 핸드폰을 꺼내 결제 애플리케이션을 작동하는데, 문득 등골이 서늘해진다. 분명 놈은 ‘오늘은’이라고 했다. 분명‘오늘은 일찍 퇴근했네?’라고 했다. ‘오늘은’이라니ㆍㆍㆍ. 나를 지켜보고 있어야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결제되셨습니다.”

 평소라면 점원의 말에 “수고하세요.”하고 인사한 후 나오는 나였지만, 오늘은 상기된 얼굴로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재빨리 편의점 문을 열고 나가 놈을 찾았다. 그러나 그놈이 있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계단을 내려와 주위를 둘러봐도 놈은 찾을 수 없었다.

 ‘아니야. 그냥 한 말이겠지. 그래 과대망상이야.’

 스스로를 달래며 마음을 진정시키며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잠시나마 행복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다시 새 날이 밝았다. 오늘은 목요일. 내일까지만 더 버티면 된다. 하지만 어제 정시 퇴근하고 푹 쉬었는데도 불구하고, 눈을 뜬 순간 나의 체력은 50%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게 바로 만성피로라는 것인가 보다.

 “안녕하세요. 현재 시각은 07시입니다. 현재 기온은 23도이며, 오늘 최저기온은 21도, 최고기온은 26도가 되겠습니다. 오늘은 화창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다음으로 구글로 검색한 기사를 알려 드릴게요. 사회 부문 뉴스입니다ㆍㆍㆍ.”

 침대에 안긴 채로 고개도 들지 않고 팔을 뻗어 상냥하지만 짜증 나는 AI의 입을 닫게 한다. 알람 끄기 대회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그런 대회가 있다면 세계 챔피언까지 가능할 거 같다. 오늘도 팔을 바짝 끌어 모아 메뚜기 뒷다리를 만든 후에 나를 얼싸안고 놓아주지 않는 침대를 억지로 떼어낸다. 눈을 뜨지 않은 채로 화장실로 향하여 양치질을 한다. 아직도 눈이 떠지지 않는다. 실눈으로 물의 온도를 맞춘다. 머리를 감으니 눈이 좀 뜨인다. 오늘도 뼛속까지 박힌 노예 정신이 반항하는 몸을 조종하여 억지로 정장을 입는다. 눈만 뜬 채로 문을 열고 나와 두 바퀴를 돌아 내려와 1층 공동현관을 나선다. 화창하다고 하더니 벌써 공기가 따뜻하다. 더우면 잠 깨기가 더 어렵다.

 몽롱한 상태로 인도가 없는 길을 따라 역을 향하여 좀비처럼 걷는다. 하늘은 파랗고 해는 ‘나 여기 있소!’하며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낸다. 역에 가까워지니, 무채색의 몽롱한 좀비들이 하나, 둘 몰려든다. 좀비 세상의 맑은 날을 연출하면 꼭 이럴 거 같다. 

 그때 빨간 스포츠카가 엄청난 굉음을 내며 내 옆을 바짝 스쳐 지나갔다. 그 소리와 기세에 심장이 철렁하며 깜짝 놀랐다. 그러다 인도도 없는 길에서 그렇게 거칠게 운전하는 놈의 운전습관 때문에 갑자기 화가 솟구쳐 올랐다. 

 ‘아오! 저 놈 지나갈 때 다리라도 뻗었어야 했는데! 그러면 당분간 저 놈한테 돈 받아먹으면서 편하게 쉴 수 있었을 텐데!’

 혼자 놀라고, 혼자 화내고, 혼자 속으로 불평하는 사이에 그 쨍한 빨간 스포츠카는 저 앞으로 나아가 있었다. 지금 와서 뭘 하기에도 늦어버렸다. 그냥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다시 좀비처럼 역을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에 멍하니 몸을 싣고 지하로 내려가서 다가오는 깡통에 몸을 실었다. 그 좁은 통 안에서 개체수가 너무 불어나 갈 곳 없어진 좀비들처럼 그저 허공을 응시하며 아무 생각 없이 한 시간을 이동했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회사에 도착해 있었다. 

 “차장님, 안녕하세요!”

 “어~. 어서 와.”

 오늘도 나는 2등이다. 아직 정신을 다 차리지 못한 나는 김현수 차장님께 예를 갖추기 위해 배에 힘을 잔뜩 주고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야만 했다. 인사하는 것만으로 또 체력을 소모했다. 회사 도착해서 몸을 스캔해보니 체력이 한 10~20% 정도밖에 남지 않은 거 같다. 눈을 뜨며 50%, 회사에 오느라 30% 정도 체력을 소모했으니, 남은 하루를 버티기 위해 오늘도 미래의 나에게 체력을 대출받아야 할 거 같다. 그래도 최대한 조금 대출받기 위해 탕비실에서 커피를 탄다. ‘윙~’ 소리와 함께 커피 캡슐에서 까만 물이 터져 나온다.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 향을 맡으니 뇌가 각성되기 시작하며 3% 정도 체력이 오르는 거 같다. 곧바로 내려진 커피를 홀짝 한 모금 마시니 뇌가 가동되고, 몸이 조정되는 느낌이다. 커피의 힘으로 뇌가 가동되고 잘 조정되어 30%의 체력을 가진 채로 오전 일과를 시작할 수 있었다. 오전 일과로 적당히 예열하며 체력을 더 끌어올려야 한다. 

 오전 일과는 별 거 하지 않아도 금방 끝나버린다. 시작하고 좀만 지나면 점심시간이 되어 버린다. 순식간에 점심시간이 되어 움직이려는데, 갑자기 활달한 박진서 씨가 사랑스러움 가득한 향기를 몰고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오후에는 진짜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데, 오전은 진짜 시간이 짧은 거 같아요. 나만 그런가?”

 “당연한 거죠. 오전은 9시부터 12시까지 3시간이고, 오후는 1시부터 6시까지 5시간이니깐 당연히 오전이 짧고, 오후가 길죠.”

 나도 박진서 씨가 체감하는 부분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는 말이었지만, 그게 참 별일인 것처럼 말하는 박진서 씨의 말과 행동이 얼굴만큼 귀여워 일부러 사실에 대해서만 대답했다.

 “어머! 맞네! 현석 씨 천재네!”

 박진서 씨가 밝게 웃으며, 사랑스러운 향수 냄새를 풍기며 내 팔뚝을 가볍게 때렸다. 나는 흘러들어온 사랑스러운 향기와 밝게 웃는 그 모습에 불쑥 사랑스러움과 설렘을 느꼈지만, 박진서 씨는 3년이나 사귄 남자 친구가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구태여 그 불쑥 올라온 그 사랑스러움과 설렘을 넣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이내 옆에서 박진태 부장이 찬물을 끼얹었기 때문이다.

 “그게 천재면, 온 세상이 천재들뿐이겠네. 허튼소리 말고 밥들이나 먹고 와. 빨리 먹고 와야 빨리 일하지.”

 밥맛이 뚝 떨어졌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나는 굳은 얼굴로 출구만을 응시하며 나갔다.  

 평소 우리 팀은 별일이 없으면 알아서 밥을 해결한다. 나는 주로 혼자 나가서 거하게 점심을 먹는 편이다.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남은 일과를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점심에 쓰는 식비가 생활비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먹어야 이 지옥 같은 일상을 버틸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오늘은 주머니도 가벼우니 가볍게 햄버거를 먹기로 한다.

 1층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오니 태양빛이 나에게 쏟아진다. 자동적으로 눈을 보호하기 위해 눈썹 위에 손을 붙이고 인상을 쓴다. 위에서 쏟아지는 태양빛만큼 아래에서는 지열이 올라온다. 지열은 어떻게 방어할 방법이 없어 재킷을 벗어 손에 걸친다. 이제 완연한 여름이 된 거 같다. 혼자 인상 쓰며 발길을 돌리려는데, 아침의 무채색 좀비들이 사람이 되어 삼삼오오 밝게 웃으며 활기차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만 아직도 좀비다. 햄버거라도 씹으면 좀 낫겠지ㆍㆍㆍ.

 혼자 조용히 햄버거를 먹고 나니 나도 좀 사람답게 되었다.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다 보니 벌써 오후 3시다. 이때부턴 진짜 시간이 달팽이 기어가듯 흘러간다. 무슨 시간의 저주에라도 걸린 거 같다. 엄청 많은 일을 처리하고 시간도 엄청 흘렀을 거 같은데, 시계를 보면 거의 제자리걸음이다. 이 저주받은 시간에는 별일을 다 해도 10분~20분 정도씩밖에 흐르지 않는다. 어떻게든 버티다 보니 퇴근시간인 오후 6시가 되었다. 어제 다들 정시 퇴근해서인지 오늘은 모두 선뜻 집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 박진태 부장이야 맨날 할 일이 없어도 밤 8시까지는 있다가 간다. 집에라도 빨리 들어가지. 왜 안 가는지 모르겠다. 여러모로 거슬린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수고했어요.”

 그래도 오늘은 마지막까지 사무실에 남은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 21시가 되도록 해외 거래처의 클레임을 막느라 골머리 앓고 있는 박진서 씨를 돕기 위해 김현수 차장님이 발 벗고 나섰다. 그 둘을 나도 돕고 싶지만, 내 코가 석자다. 

 1층 로비의 경비원 김 씨 아저씨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김 씨 아저씨의 무뚝뚝한 시선을 황망히 뒤로하고 밖으로 나오니 공기가 많이 차분해져 있었다. 아직 그래도 밤공기는 시원하다. 차분한 공기로 리프레시하며 역으로 향했다. 역 근처에 도착하자 역시나 젊은이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혹시나 저번에 봤던 보라색 똑 단발의 그녀가 있는지 재빠르게 스캔해봤지만, 오늘은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하긴ㆍㆍㆍ. 그녀가 있다고 해도 나 같은 게 뭐 어쩔 건데ㆍㆍㆍ.’

 헛된 기대를 접으며 지하로 걸어 들어간다.


 동네에 도착하니 22시 25분. 전철 하나를 놓쳐 피 같은 10분을 낭비했다. 오늘도 편의점에서 조각 치킨과 맥주를 사서 들어가려고 생각하며 지상으로 향한다. 그런데 요새 파블로프의 개처럼 편의점 하면 그놈이 자꾸 떠오른다.

 ‘또 그놈이 있지는 않겠지?’

 그놈 생각에 긴장되어 나를 지상으로 올려주는 에스컬레이터의 벨트를 나도 모르게 꽉 쥐어 잡았다. 그리고 거의 다 올라왔을 쯤에 까치발을 들고는 머리를 위로 빼내며 눈을 먼저 정찰 보냈다. 

 ‘없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다 내가 왜 그놈 눈치를 봐야 하는지 살짝 짜증이 밀려왔다. 그러다 바로 조각 치킨과 맥주를 먹을 생각에 들떠 가벼운 발걸음으로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에서 목적을 달성하고 집 근처 다 왔을 때, 우리 원룸 건물 앞 가로등에 익숙하면서도 불길한 실루엣이 가로등에 기대어 갖은 폼을 다 잡은 채로 담배 피우고 있는 것이 눈에 잡혔다.

 ‘설마ㆍㆍㆍ. 아니겠지ㆍㆍㆍ.’

 “엇! 개새끼! 이제 와? 오늘은 늦었네?”

 아니기는 개뿔ㆍㆍㆍ. 항상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그놈이 웃으며 또 욕을 한다. 게다가 또 ‘오늘은’이라니ㆍㆍㆍ. 나야말로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혹시 사달을 내는 한이 있더라도 제대로 따져 물어야겠다.  

 “야 적당히 해라. 언제 봤다고 반말에 욕설이야? 그리고 나보다 나이도 어린 거 같은데 부모님이 그렇게 가르쳤냐?”

 “아이고ㆍㆍㆍ. 그래쪄요? 화가 나쪄요?”

 미친놈이다.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더 놀리려고 인위적인 울상을 지으며 달려든다. 여기서 당황하거나 전처럼 피하면 안 된다.

 “되게 막돼먹은 놈이네! 이거! 너 자꾸 나한테 반말하고 욕하고 그렇게 쓸데없는 관심 보이면 모욕죄, 스토킹 죄로 경찰 부를 거야! 너 콩밥 먹고 싶어?”

 경찰 이야기가 먹혔는지 놈은 갑자기 한 발 물러서서 양팔을 들어 보이며 이성을 되찾은 거처럼 나의 요구를 파악했다.

 “알았어. 내가 너에게 반말하고 욕하고 쓸데없이 관심 보이는 게 싫다는 말이지?”

 “그래. 나에게 일절 관심 끄고, 편의점 계단 앞 막고 담배 피우지도 마.”

 나는 다시 단호하게 나의 입장을 못을 박았다. 그런데 이성을 되찾은 줄 알았던 놈은 여전히 미친 상태였다.

 “오케이. 접수. 대신 치킨 사줘.”

 어이가 없었다. 치킨 사주라니. 언제 나한테 맡겨놨다는 듯이 너무나도 당당하게 요구했다.

 “진짜 미친놈이네! 이거! 너 진짜 콩밥 먹고 싶어?”

 “아니. 네가 너에게 일절 관심 끄고, 편의점 계단에서 담배 피우지 말아 달라며, 네 부탁 들어주는 대가로 치킨 한 마리 못 사줘? 그러면 나도 네 부탁 들어줄 필요 없지.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경찰한테 신고해봤자 ‘그래서 무슨 피해라도 당하셨나요? 그게 아니면 일단 두고 보시죠. 순찰을 강화하는 것 외에는 저희가 해드릴 건 없습니다.’ 이렇게 답변할걸.”

 내가 피해 입은 점에 대해 항의하는 것을 나의 부탁이라고 받아들이며 그 대가를 당당히 요구하는 것을 생각하면 미친놈이 확실하지만, 의외로 뒤의 경찰의 대응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은 꽤나 현실적인 거 같았다. 그래도 나는 더 이상 물러서기 싫었다. 아니 물러서면 안 될 거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내가 경찰에 신고를 해보지 않으면 놈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 모를 일이다.

 “너 내가 경찰에 신고할 거야.”

 나는 바로 전화기를 들어 놈을 노려보며 112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놈은 팔을 들어 올리며 으쓱하는 몸짓을 취하며 나를 여유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경찰에 신고를 하는 거였기에 굉장히 떨렸지만,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경찰입니다. 말씀하세요.”

 “여기 어떤 사람이 저에게 욕을 하고 일주일 정도 스토킹을 했습니다. 지금 같이 있으니 당장 와서 잡아가 주세요.”

 “근처에 순찰 중인 경찰이 있습니다.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3분 정도 걸립니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빨리 와달라고 재차 강조한 후 전화를 끊고 놈을 노려봤다.

 “3분이면 경찰 온다.”

 “그래 오면 잘 말해봐. 소용없을 테지만.”

 놈은 여유롭게 웃으며 대꾸하고는 그대로 내가 사는 원룸 건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는 놈을 향해 소리쳤다. 

 “야. 기다려! 곧 경찰 온다니깐 기다리라고!”

 놈은 내 말을 무시하고 그저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이윽고 경찰차 한 대가 골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중년의 경찰과 젊은 경찰이 도착한 경찰차에서 내렸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중년의 경찰에게 놈이 욕한 이야기, ‘오늘은’이라는 단어를 쓰며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정황 등을 간략하게 상황을 전달하였다. 

 “그래서 무슨 피해라도 당하셨나요?” 중년의 경찰은 ‘뭐가 더 없느냐?’라는 듯이 물었다. 

 “그로 인해 무슨 피해를 당한 건 아니지만ㆍㆍㆍ.”

 “선생님, 일단 모욕죄라는 게 공공연성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 말씀으로는 둘만 있을 때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모욕죄가 성립되기 좀 어렵네요. 또 스토킹이라는 게 피해자의 의사를 반해 따라다녔다는 것만으로는 당장 체포하기가 어렵죠.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위법행위를 한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증거’가! 지금 상황으로써는 저희가 이 근방의 순찰을 강화하는 것 외에는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중년의 경찰이 나의 말을 끊고 그들의 입장을 정리했다. 물론 경찰의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박진태 부장을 모욕죄로 고소할 생각으로 알아봤던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에 경찰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잔인하고 매몰찬 입장 정리를 따르게 되면 나는 한동안 무력감을 뒤집어쓴 채로 놈이 또 언제 나타날지,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하며 불안 속에 지내야 한다. 이대로 이들을 보내면 놈의 말대로 흘러가게 된다. 이렇게 그냥 보낼 수는 없다.

 “아니! 그러면 제가 칼에라도 맞아야 경찰이 조치를 취한다는 말입니까?”

 “선생님. 그런 게 아니라, 법이라는 게 그래요. 아무리 우리가 경찰이라도 정해진 법의 절차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중년의 경찰이 난색을 표하며 대답을 한다.

 “그러면 이 건물에 사는 거 같으니깐, 찾아서 주의라도 좀 주세요.”

 최소한 경찰이 주시하고 있다는 것만이라도 놈이 알아야 속이 편할 것 같았다. 중년의 경찰은 한숨을 쉬며, 땅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게 중년의 경찰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던 차에 갑자기 무전 소리가 들렸다. 중년의 경찰은 무전 음이 나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젊은 경찰이 경찰차에서 누군가와 무전을 주고받더니 중년의 경찰을 불렀다. 젊은 경찰의 부름에 중년의 경찰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달음에 무전을 받으러 가더니 무전을 마무리하고, 젊은 경찰과 이런저런 말을 하더니 돌아와 나에게 다시 자신들의 입장을 통보하였다.

 “선생님 현재로서는 직접적인 피해가 발생한 게 없고 확실한 ‘증거’도 없으니, 저희가 즉각적으로 조치할 수 있는 일이 없네요. 일단 저희가 이 근방 순찰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마무리하고 당분간 지켜보시죠. 지금 건너편에서 칼부림이 났다고 해서 저희도 바로 지원하러 가봐야겠습니다. 그럴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 주십시오. 저희가 바로 출동하겠습니다.”

 중년의 경찰은 다급하게 말을 끝마치자마자 젊은 경찰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이렌을 울리며 골목을 빠져나가버렸다. 나는 그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럴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 주십시오.’라니ㆍㆍㆍ. 중년의 남자 경찰이 남긴 말을 곱씹다 보니 안심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불안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다음번에 진짜 그럴 일이 생기면 이미 늦은 거 아닐까?’

 착잡한 마음을 이끌고 집에 들어오니 눅눅하고 차가운 조각 치킨과 뜨뜻미지근한 맥주가 손에 들려 있었다. 먹기도 싫고, 먹을 마음도 들지 않아 책상에 대충 던져 놓고 침대에 곧바로 몸을 던졌다. 박진태 부장, 회사일, 내 고달픈 인생만으로도 골머리 아픈데, 미친놈 하나 때문에 난생처음으로 경찰까지 동원하고 이게 무슨 난리인지 모르겠다. 

 ‘진짜로 치킨이라도 사줘야 하려나ㆍㆍㆍ. 사 주면 순순히 물러날까?

 원래도 집에 오면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고민해봤자 답도 없는 상황을 마주하고 나니 더욱더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그저 오늘 밤에는 눈을 감고 숨만 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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