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의 계절 가을
날씨가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날이었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오랜만에 회사 근처를 걸었다. 산책을 사랑한다. 좋아하는 것 그 이상으로 즐기며, 아낀다. 어느 드라마에선가 주인공이 ‘인간은 걸을 때 가장 인간다울 지도 몰라’라고 말한 것에 동감하며 걷는다. 인간만이 두 다리로 사색하며 걷는다. 생각과 움직임. 이토록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주고받는 과정을 산책이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해 내는 이 행위예술은 오로지 인간이기에 가능하다. 고밀도의 상념들을 한걸음마다 탈각한다. 가을은 높은 하늘의 고고함에 대하여 논하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발밑에 깔린 다채로운 색채만으로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푸릇한 잎사귀를 떨궈내고 잔뜩 말라버린 모습이 바닥에 나뒹구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쩐지 늙어감에 대하여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만물이 움트는 봄을 지나 수분마저 메말라가 몸을 한껏 웅크린 노인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계절. 그러나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살아있는 것에 대하여 온몸으로 느끼는 계절. 울긋불긋한 색채가 바닥을 물들이면, 내가 나아가는 길은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딛고서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의식하게 된다.
죽어가는 것들. 요즈음 엄마가 꿈에 자주 나온다. 아직도 여전히 꿈속에서 나는 인지하지 못한다. 죽은 사람이 나오면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둥, 예지몽이라는 둥 흔히들 말하는 클리셰 같은 진부한 느낌은 받아본 적 없다. 꿈속에서 엄마를 마주할 때마다 엄마가 죽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번 나는 속아 넘어간다. 엄마가 살아서 돌아왔구나! 그리고 다시 꿈에서 깨면 똑같이 삭막한 아침이다. 전과 달라진 점은 눈물짓거나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허둥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속으로 생각한다. 또 꿈이었구나.
엄마의 기일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가을은 언젠가부터 상실의 계절이다. 덧붙여, 모순의 계절이다. 삶과 죽음이 어두운 밤 도로 위 헤드라이트 불빛처럼 즐비하게 교차하는 계절. 참 어리석지만 나는 종종 죽음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엄마의 폐가 커다란 암에 짓눌려 중환자실에서 겨우 붙이고 있던 숨을 끝끝내 떼 버린 게 아니라 나와 같이 차를 타고 가다가 차사고가 나서 죽은 것만 같다. 아니면 집안에 불이 나서 죽었거나. 공통점은 나와 같은 공간에 있다가 죽은 것이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나만 살아남았다는 것. 찝찝하거나 두렵거나 아니면 죄책감이거나 무엇을 갖다 붙여도 말이 되지만, 무엇을 갖다 붙여도 충분치 않은 어떤 감정을 느끼며 늘 기일을 맞이한다고 선생님께 말했다. 선생님은 살짝 헛웃음을 짓더니 ‘그럼 혜진 씨가 엄마랑 같이 순장이라도 당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나요?’ 나는 차마 웃을 수 없었지만 애써 그 정도는 아니지만요.. 말끝을 흐리는 걸로 내 마음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럴 각오는 언제든 준비되어있다는 이 이상한 마음의 출처를 나는 알아내었다. 부채감. 내 마음의 빚을 이제는 두 번 다시 탕감할 수 없다는 막막함이 빚어내는 고요함. 엄마를 생각하면 나의 바다에는 한동안 파도가 밀려오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까만 물의 고요함.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물인지 하나의 덩어리인지, 하늘인지, 바다인지 경계가 희미해지는 그 순간. 움직임이 사라진 밤바다의 정적이 나는 무서웠다. 그럴 때면 내가 스스로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라도 한 듯 발밑이 금세 물웅덩이 한가운데를 딛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얼마나 많으면 아직까지 유구한 어느 방송에 물 위를 걷는 방법을 안다며 출연한 적이 없으니 나는 곧이어 침몰될 것이다. 꼬륵꼬륵. 코가 얼얼할 정도로 물을 잔뜩 먹고 눈물이 찔끔 나올 때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음을 눈치챈다. 그렇다면 거기가 그토록 원하던 곳이 될 수 있을까. 죽음. 하지만 이내 정신을 단디 붙들어 맨다. 날마다 죽음을 상상하면서도 죽을 일 없을 거라 다짐한다.
그 언젠가 처음으로 서울에 전시회를 보러 가겠다고 맘먹은 날. 정신 똑바로 차려 거기는 눈 뜨고 있어도 코 베이는 곳이야. 너무 진부해서 철 지난 대사를 치는 엄마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정신 차려! 가만히 있다가 더 깊숙이 빠지고 말 거야. 단순히 얼얼할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걸? 진짜로 베어버릴 수도 있어. 죽음은 네 모든 걸 빼앗거든. 마지막 말을 끝으로 댕강- 코가 썰렸다.
허무맹랑한 꿈인 줄 알면서도 일어나자마자 코를 매만졌다. 아직 붙어있는 코를 확인하고 숨을 내뱉었다. 순간 차오른 안도감이 혐오스럽다. 결국 그 어느 것에도 진심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난 죽고 싶지도 살고 싶지도 않다. 말장난 같다고? 그렇다면 이런 말장난도 하고 싶지 않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매일매일 한 칸씩 내려오고 있다. 마침내 바닥을 짚었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 아니면 검은 바다 속일지 나도 내 맘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매일 아침 갈무리하지 못한 밤들을 가방에 대충 접어 욱여넣고 출근길을 걷는다. 지금 걷고 있구나. 두발로 걷고 있으니 나는 인간이구나. 인간은 걸을 때 가장 인간답다는데 나는 지금 인간답구나. 그러다 바스락 거리는 낙엽을 눈치채고 잠시 발밑을 바라본다. 지금은 죽음을 지르밟고 있으니 물웅덩이 하나 없이 뽀송하다. 새로 빤 수건 같은 발걸음이 되어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 역시 가방에 대충 구겨 넣는다. 날씨가 추워졌으니 회사 근처 식당이 황태해장국을 개시했으려나? 점심메뉴를 생각하다 보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어엿한 한 인간인 내가 느껴진다. 날씨가 쌀쌀해져 배가 고프고 춥다. 그래, 이제 나는 서울에 가도 코 베이는 일 따위는 없는 어른이란 말이지. 대충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의 세월을 셈해본 뒤 팔짱을 더욱 단단히 낀다.
할 수 있을까? 죽지 못해 사는 거 말이야.
-다들 그래. 죽지 못해 산다고 다들.
남이 그러든 말든 중요하지 않아. 내가 그럴 수 있는지를 묻는 거야.
-어제의 네가 낙엽을 밟으며 걸어가듯 그렇게 하면 될 거야. 어느 날 물웅덩이로 네 발을 적셔도, 이내 가을 하늘에 시선을 뺏기는 동안 말라버리고 말겠지. 절망은 생각보다 깊게 찾아와 온몸을 파도처럼 휘감지만, 다시 떠나가면 알알이 반짝이는 모래알일 뿐.
절망이 너무 자주 찾아와서 떠나가지 않으면 어떡해?
-반드시 떠나갈 거야. 낙엽이 지듯, 여름이 지나면 겨울이 오듯, 누군가는 이별하고 누군가는 사랑하듯 너무 당연한 약속은 지킬 걸 담보하지 않아도 이뤄지는 법이니까.
어떤 봄은 꽃이 피지 않았다. 어떤 여름은 비만 내렸고, 어떤 가을은 누군가가 죽었다. 어떤 겨울은 한 번도 눈이 내리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갈 것이다. 그게 당연한 약속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