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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yj Aug 20. 2024

불면의 밤

우에하라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 속 주인공이다. 그는 공생충에 휘둘리며 자아를 잃어가던 히키코모리였다. 공생충은 오랜 기간 쓸쓸하던 그에게 삶의 활력과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해 줬다. 소설 속의 우에하라는 살인자이다. 하지만 우에하라에게는 살인이든 도둑질이든 그 어떤 나쁜 짓도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공생충을 통해 얻은 목표와 가능성만이 중요했다. 물론 공생충은 우에하라의 불안과 우울이 만들어낸 그만의 환상일 수 있다. 하지만 오랜 기간 혼자였던 그에게 공생충의 존재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의미를 찾고 싶었을 뿐이다.       


 반면에 키에르케이고는 불안은 근원적이고 원초적이며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Lacan, J. 는 불안은 환원 불가능한 근원적인 감정이며 의식, 욕망, 무의식과 같은 주관적 정서를 통해 미적으로 승화할 수 있다고 했다. 우울감도 마찬가지다. 시인, 미술가, 작가, 음악가 등의 예술가 중에는 적게는 44%에서 많게는 77%까지 우울을 경험한다고 하지만 이들은 불안의 '가능성'과 함께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우울을 승화시켰다.                

 생각해 보면 오랫동안 불안과 우울은 누구는 우에하라를, 누구는 뭉크를 만들어왔다. 물론 뭉크도 술에 의존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가 그려낸 '절규'는 불안하고 우울한 사람들의 절망과 아픔을 대변하고, 태양의 벽화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보게 한다. 하지만 슬픈 사실은, 우리에게는 뭉크보다 많은 우에하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혼자서 수많은 생각과 싸우며, 수많은 불면의 밤을 통해 스스로를 공생충에 감염시키고 있다. 그렇게 고립에 고립을 거듭하고 있다.                 

 나도 불면의 어느 밤, 스스로 감염된 내 안에 우에하라를 발견한 적이 있다. 분명히 그건 할아버지의 콧속에서 옮겨 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때의 나는 우울과 불안과 강박의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있었다. 나는 약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조차도 쉽게 할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우울했고,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을 만큼 절박했다. 정말 공생충이라도 필요할 만큼 절실했다. 다행히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그 순간을 넘길 수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우에하라들은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서 버티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의 아이들이 두려움을 통해 성장하고 스스로를 병들이지 않도록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의 답을 찾고 싶다. 그리고 더 이상의 우에하라가 생기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좀 더 다정하고 따뜻해지길...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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