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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새타니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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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yj Sep 14. 2024

업보의 시작

송연의 혼례가 있던 날, 선은 송연과  대둔산 마천대로 떠났다. 그리고 그 뒤를 어린 새타니가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선은 마을이 피바다가 되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단애(斷崖)가 절경을 이루며 눈앞에 펼쳐졌다. 셋은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거 알아?" 어린 새타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뭘?" 송연이 조용히 되물었다. 

"여기에는 나라를 잃었던  한 유신의  딸들이 흘린 눈물로 만들어진 샘물이 있대."

"그래?" 송연은 궁금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건성으로 대답했고 새타니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얼마나 슬픔이 컸으면 그리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딸들의 눈물이 말라 바위가 되어버린 것도 너무 슬프지 않아?"

"그래." 송연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선." 새타니는 갑자기 선의 이름을 불렀다. 선은 새타니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지옥불에서 긴 시간을 인간 세계를 꿈꾸면서 살았어. 그저 비명과 고통만이 가득한 지옥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내 눈으로 보고 싶었거든. 근데 그때 그 아이가 내게로 들어왔어."

"그 아이?"

"그래. 그 아이, 너의 형제이자 진정한 나로 만들어준 진짜 김선."

"나는 형제가 없어." 선의 시큰둥한 말에 새타니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없었지. 하지만 다시 돌아왔어. 네 어미가 너를 가지고자 죽여버렸던 배 다른 형제. 또 다른 김 선. 그 아이가 나로 다시 태어났거든."

 "나는 네가 태어나던 날도, 자라는 동안에도 내내 곁에 있었어. 기억나지?" 새타니의 말이 선은 놀랍지 않았다. 피 흘리던 아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너는 왜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렸어?"

"그건 피가 아니야. 너의 형제인 나의 눈물이었어. 선아. 나는 이제 자라기 시작했어. 더 이상 아이가 아니야."

새타니의 말에 무덤덤하던 송연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는 원래 자라지 않는 거 아니야?"

"그래. 나는 너희의 어린 시절의 모습 그대로인 새타니였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제 때가 되었어."

새타니는 송연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여인의 살결은 참으로 따뜻하고 부드럽구나. 그러니 이것이 사리지는 순간은 너무나 고통스럽겠지."

새타니는 송연의 다른 손도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서방에 사는 어떤 새는 자신의 몸을 태워 불사의 삶을 살아간대. 그런데 그거 알아? 지옥도 마찬가지라는 걸. 팔열지옥(八熱地獄)은 너무나도 뜨겁단다. 그곳에는 수많은 죄인들이 뜨거운 구유 속에서 자신을 불태워 영원의 삶을 살아가고 있어. 비록 고통과 함께라도 그것 역시 불멸은 아니겠니?" 새타니는 이제 김선의 손을 잡아 쓰다듬기 시작했다.

"선아. 나의 아우야. 나는 너를 미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를 지옥불에서 건져올릴 너의 고통이 필요하구나. 인간의 감정이 남아있는 네가 너무나도 필요하단다. 안타깝게도 네 아비의 죽음은 너에게도, 그리고 누구에게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새타니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  

"나는 너의 고통의 끈을 찾았단다. 그리고 이제 너의 심장이 나를 성장시킬 것이다." 새타니의 말이 선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찬찬히 살펴보니 새타니는 그 사이 조금은 자라 있는 것도 같았다. 

"너는 좀 자랐구나."

"그래. 나는 자라고 있어. 이제 나와 갈 곳이 있어." 새타니는 웃으며 대답했다.

"거기가 어딘데?"

"거의 다 왔어." 새타니가 웃으며 선의 손은 쓰다듬었다. 순간,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졌고 발아래 커다란 개울이 나타났다.

"여기가 어디야?"  송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말했잖아. 유신의 딸들의 눈물이 샘을 만들었다고. 3명은 샘을 만들었으니 수많은 인간들은 삼도천 정도는 만들어야지."

"삼도천? 우리가 죽는 거야?" 송연의 혼란스러운 물음에 새타니의 얼굴에는 정적이 흘렀다. 

"죽음이 뭐야?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것인가? 송연아. 그건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한순간에 끝나는 의미 없는 의식일 뿐이지."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선, 너도 말 좀 해봐." 송연은 선을 다그쳤다. 선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새타니에게 물었다. 

"네가 나의 형제라고 치자. 그렇다면 진심으로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선의 물음에 새타니는 크게 미소지으며 화답했다. 

"너의 고통. 그리고 나의 이름을 되찾고 싶다." 새타니는 더 크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송연의 온몸이 불길에 사로잡혔다. 선은 놀라 송연을 잡으려고 했지만 새타니는 기다리지 않고 송연을 삼도천 다리 아래로 밀어버렸다. 선은 비명을 지르며 뛰어내리려고 했지만 새타니는 그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고통이 느껴지느냐?" 새타니의 말에 선을 고개를 돌려 새타니를 바라보았다. 그새 새타니는 더 자라 있었다.  

"그 고통을 기억해라. 절대 잊으면 안 돼. 너의 고통, 아비와 어미의 업보, 그걸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그 고통이 커질수록 나는 더 빨리 어른이 되어 세상으로 나올 것이다. 그리고 이름을 되찾아 나에게 고통을 주었던 모든 것들을 사라지게 할 것이야." 새타니는 소름 돋는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선은 송연이 사라진 세상이 주는 고통과 공포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이것이 너에게 무슨 의미가 된다는 것 아냐?" 선은 고통과 분노에 가득 차서 물었다.

"인간은 가진 것의 소중함을 모르지. 그래서 잃고 나서야 왜 그렇게 후회를 하는 건지. 가족도 연인도 동무도 마찬가지다. 모두 잃어봐야 그것의 소중함을 알 수 있어." 

"이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냐? 송연을 잃은 나의 고통, 그럼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졌느냐?"

"아니. 마지막 제물이 남았어. 내 오랜 원한의 마지막 씨앗." 새타니는 잠시 숨을 고르며 말을 이어갔다. 

"서방에서는  신들이 내뿜는 마법의 힘을 잡을 수 있도록 동물을 박제하여 죽음의 길동무를 만들어준다고 해. 선아, 너는 나의 길동무가 될 것이다." 새타니는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리 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비록 지금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고. 나는 너를 찾아낼 것이고 너와 인간들은 결국은 지옥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 말에 김선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제란 늘 그렇듯 서로의 것을 노리고 뺏으려 하지. 언제나  싸우고 시기하지만, 그래도 늘 함께하는 것이 형제가 아니겠나."

"그게 무슨 말인가?" 순간 선은 새타니를 품속에 세게 안았다. 

"너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는 이내 새타니와 함께 삼도천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노인은 천천히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세상의 비명과 고통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듯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새타니는 어른이 되었고 세상은 고통스러운 저주에 갇히게 될 것이다. 노인의 눈에서는 또다시 눈물이 고였고 아내 발끝부터 타오르는 불길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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