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무입니다.

나는,입니다

by 아슈엔


나는 제물포 마을어귀에 느티나무였습니다.

누가 언제 나를 심었는지 내겐 기억이 없어요.


일본군들이 벌목을 해 휑해진 마을이었으니

어쩌면 성난 얼굴의 이장이 심었을지도,

아니면 양조장 주인이 큰소리 떵떵 치며 가져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뿌리를 내릴 때부터 내 그늘엔 작은 웃음들이 모여들었어요.

공기놀이, 말뚝박기, 조잘대는 목소리들.

그중 한 아이는 늘 내 허리를 쓰다듬고 인사하곤 했죠.

마을 어르신들 얘기에 귀를 기울이던 또렷한 눈빛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일본 군인들이 아이를 끌고 갔어요.

팔은 멍투성이였고, 입술엔 피가 말라 있었어요.

그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왜인지 모를 슬픔이 가지 끝까지 전해졌습니다.


그해 여름, 마을 어귀에서 통곡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안 된다! 이놈들!”

매달리는 주민들을 그들은 발로 걷어차고 몽둥이로 내리쳤어요.

수레 가득 실린 쌀과 그릇, 돼지들이 배에 실렸어요.


한동안 마을이 조용했습니다.

그러다 낯선 얼굴들이 나타났습니다.

높은 코, 노란 머리, 생경한 말투.

그들은 검은 책을 들고 다녔고 아픈 아이들에게 약을 나눠주었습니다.


나는 멀리서 바라보며 저 사람들이 왜 이곳까지 왔는지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내 그늘 아래서 그 책을 읽는 소녀의 미소를 보며

마음이 따뜻하기도 했습니다.


그 소녀가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어느 날,

포성이 제물포까지 밀려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라졌고 많은 아이가 울었습니다.


그 소녀는 아이들만 남기고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첫째가 내 앞에서 구멍 난 신발을 고쳐 신었어요.

"오빠가 배 타서 쌀 사 올게, 기다려."

나는 바람을 막아보려 가지를 낮추었지만

결국 언제나처럼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고통과 약탈, 희망과 생존이 몇 겹의 계절을 지나갔을까요.

공사 굉음이 터져올라 내 가지에 둥지 틀던 어미새가 놀라 날아가버렸습니다.


나는 그 시절의 속도와 소리들을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다들 바쁘게 어디론가 향할 때 나는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니까요.


얼마 후, 톱날이 내 몸을 파고들었습니다.

하늘이 기울고 흙냄새가 콧속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나의 생명은 끝이 났지만 마지막 순간에 이상하게 편안했어요.

이 마을의 여름과 비명과 웃음과 침묵을 나는 나이테마다 새겨두었으니까요.


잘린 뒤 나는 몇 번이나 트럭을 옮겨 타며 바다 냄새가 점점 가까워지는 걸 느꼈어요.

연안부두 공원, 바다를 마주한 정자.

사람들은 나를 기둥으로 세웠습니다.

칠을 몇 번 덧바르고, 상처 난 부분을 다듬고, 마지막에 망치질로 내 몸을 단단히 고정했어요.


그날부터 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동틀 무렵 갈매기들이 날 찾고,

새벽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무거운 발걸음도 가장 먼저 보았습니다.


어떤 이는 내 기둥에 기대어 허리를 펴고,

어떤 이는 울다 잠깐 숨을 고르고 갔어요.

어떤 이는 바다를 욕하고,

어떤 이는 사랑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제 그늘을 드리울 순 없지만

지나는 사람들의 잠시 앉을자리와 멀미 가시는 동안 기댈 어깨가 되었습니다.


제물포에서 한 세기를 버티던 나는

연안부두에서 다시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는 기둥이 되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하루를 붙잡아주는 그런 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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