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입니다
나는 누군가의 뱃속에서
가장 길고, 가장 많이 참고,
가장 오래 굽이돌며 살아온 존재다.
얘랑 40여 년을 같이 살았다.
그 세월...
이건 우정보단 애증에 가깝다.
초반 십몇 년은 참 좋았다.
배앓이도 거의 없고, 먹는 것도 순하고, 소화도 편안했다.
평화로웠다.
그런데 16년인가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밤마다 야자하며 공부한답시고
영양가 한 톨 없는 떡볶이를
매일 나한테 퍼부어 주기 시작했다.
"저기... 단백질은... 비타민은...? 나 좀 살자 제발..."
근데 얘는 들은 척도 안하고
친구들이랑 에쵸티 노래 흥얼거리며 떡볶이를 흡입했다.
그 순간 나는 생존 스위치를 눌렀다.
지방저장 모드 ON.
그러다 어느 날 얘가 거울을 보며 말했다.
"아... 왜 이렇게 쪘지? 장이 문제인가?"
그 말에 처음으로 서운함이라는 감정을 배웠다.
내 탓을 하다니.
대학을 가고 떡볶이가 줄었을 때
나는 속으로 눈물 흘리며 외쳤다.
"드디어 숨통이 트인다!"
그런데...
술.
술.
술.
소주와 맥주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걸 보며
나는 처음으로 얘를 미워했다.
위장팀은 병가 내고,
난 소화와 정리까지 혼자 떠맡아
거의 폭발 직전이었다.
취업 후엔 밥을 씹지도 않고 통째로 던져 넣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울면서 애원했다.
"제발… 원래 크기로 보내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만 보내줘…"
그리고 밤엔 감자칩, 초콜릿, 라면, 빵을
감정 순서대로 먹어치웠다.
그걸 소화시키는 나는 희망과 절망 사이를 숨 쉬듯 오갔다.
먹자마자 얘가 갑자기 벌렁 눕는다.
우리 장팀에서는 이걸 "업무 포기 상태"라고 부른다.
그날은 그냥... 다 같이 죽는 거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세상에 부딪히며 지치고 상처투성이였다는 걸 알게 되니까
조금은 측은지심도 생기더라.
어느 날 치킨 대신 고구마가 들어온 저녁.
우리 팀은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오늘은 평화다!"
플레인 요거트가 들어온 아침엔
프로바이오틱스 팀이 폭죽을 터뜨렸다.
"유산균 특식이다아아!"
나는 늙었고, 얘도 지쳤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라도 조금 더 잘 살아볼 수 있다.
얘가 웃으면 소화가 쉬워지고,
운동하면 장 리듬이 살아나고,
잠을 잘 자면 전체 시스템이 쌩쌩 돌아간다.
서로를 망가뜨리던 날도 있었고,
서로 탓하던 시간도 길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40여 년을 같이 살아낸 사이다.
나는 오늘도 얘를 위해
음식들을 걸러내고,
미생물들을 정렬하고,
얘 기분을 읽으며 하루 전체를 조율한다.
나는 얘의 장이다.
평생 얘 안에서,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줄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