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어려움에 대하여.
남들 앞에 서면 유난히 긴장이 된다. 긴장이 불편한 나머지 앞에 나서는 것을 무서워했고 심히 꺼렸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바들바들 떨며 워크숍을 진행하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두 손이 언제 이렇게 차가워졌을까? 수족냉증에 걸린 사람처럼 손이 얼음장같이 시리고 차다. 일말의 온기라도 손에 잡힐 수 있도록 쉴 새 없이 손을 맞대어 비빈다. 냉해진 두 손의 느낌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더럽다.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긴장한다는 것을 직면하는 감각이어서 그럴까? 문득 고등학교 시절 손이 항상 겨울바람처럼 차던 친구가 떠오른다. 찰나 그가 얼마나 괴로웠을까를 생각하면서 연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혈색이 돌아올까 교차해서 주물러 보지만 손에 쉬이 온기가 돌지 않는다. 교감신경이 활발하게 일하고 있다는 증거다. 뇌에서 위급한 상황으로 착각해 잠시 불필요한 곳으로 혈류를 보내지 않고 도망을 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현실적으로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는데도. 워크숍 내내 이어지는 긴장 속에서 어떻게든 여유가 있는 척 애를 쓰다가 원인 모를 거대한 불안 앞에 한없이 무력함을 마주했다.
워크숍이 종료되고 차가웠던 손이 어느새 따듯한 온기를 품었다. 어떤 일이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기에 그 시간 두 손은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또 도대체 이 불쾌한 느낌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키트 위에 시약을 떨궈 병을 진단하듯 불안 한 방울에 숨어든 질병코드를 찾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고 지난 시간을 복기한다. 긴장의 시간으로 거슬러올라 빠르게 흐르는 사고위로 삽시간 뛰어들어 그 찰나의 생각을 한 움큼 쥐어낸다. 이내 펼쳐 보이면 손가락 사이로 우수수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어느새 손아귀에 남아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정확하게 무엇이 불안의 핵심이었는지 가늠이 어렵다. 다만 어렴풋이 손아귀에 쥐었던 느낌이 직감적으로 어떤 왜곡된 욕구가 아니었나 싶었다.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한다면 다른 사람보다 더 잘나 보이고 싶은 욕망. 이를테면 워크숍에서 일목요연하게 말하고 행동과 제스처는 깔끔하고 담백해야만 한다. 이후로 청중들이 보이는 표정 하나와 그들의 섬세한 몸짓까지 그 반응들을 조심스럽게 살핀다. 내 예상에 맞도록 그들에게서 긍정적인 신호를 읽어야만 한다. 청중의 피드백 하나에 무리하게 쏟아내는 에너지로 점점 고갈되지만 나는 여전히 얼음장 같은 손은 뒷짐진 채 여유 있는 척 태연하다.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천박한 졸부 마인드, 고급 수입차를 타는 카푸어들의 하차감 뭐 이런 것들과 그 궤를 같이하는 초라한 욕망이라면 너무 슬프다. 이 불안의 정의를 여기서 끝내면 스스로에게 많이 미안하기에 한 꺼풀 더 벗겨내 보기로 한다. 아니 왜곡된 욕망이라고 느끼는 만큼 질문도 살짝 비틀어 재차 자문한다. '남들에게 어글리 하게 비치면 무엇이 문제일까?' 얼추 그럴싸한 대답이 떠오른다. 성인이 된 지금 머리로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사랑이 부족하다고 믿는 내 마음속 어린이는 부지불식간에 사랑받지 못할 것을 의심한다. 그리고 그 느낌을 온몸으로 표현하고자 했고 이내 두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모양이다. 어린 시절에 기록된 혹은 왜곡된 사랑에 대한 신념이 오랜 시간을 지나도 변함없이 즉각적으로 작동한 것이다.
어슴푸레 불안의 근원을 이해했다고 하지만 사랑에 대한 왜곡된 믿음을 바로잡기 위해서 해야 할 노력들이 만만치 않을 듯싶다. 사랑에 대한 불신으로 싹트는 아이의 불안은 어른의 머리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빠르고 자동적이기 때문이다. 자라다 만,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내 어린 자아에게 계속해서 안부를 묻고 괜찮다고 안심시켜줘야 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녕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글로 적어내려가는 이 전자종이 위에서 아이와 만나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반복해서 얘기도 해주고 싶다. 모든 이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고, 조금 못난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내가 널 미워하지 않는다고, 제일 중요한 것은 네가 이 세상에 정말 소중한 존재이며 그 사실을 스스로가 절대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왜곡된 사랑의 신념은 대개 부모님을 통해 형성되었지만 이제 와서 불평하기에 나이가 너무 들어버렸다. 부모님에게서 받았던 상처는 성취를 위해서 필요한 거절도 있었을 것이고 혹은 부모의 부모로부터 배워서 몸에 밴 무지성 거절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더 기질적으로 예민해서 남들보다 더 외로워서 고독했고, 그 오랜 시간을 홀로 사랑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아무도 감히 평가할 수 없는 내 과거를 이제는 오로지 스스로 용서하고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에 비장해지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