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할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올바르지 않은 생각과 전제 3가지
1. 사랑을 ' 사랑하는'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2.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로 생각한다. 자기 자신의 교환 가치의 한계를 고려하면서 서로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최상의 대상을 찾아냈다고 느낄 때에만 사랑을 느낄 수 있다.
3.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에 '머물고' 있는 상태와 혼동한다.
형제애는 동등한 자들 사이의 사랑이고 모성애는 무력한 자에 대한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각기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성애는 완전한 융합, 곧 다른 한 사람가 결합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순수한 사랑은 생산성의 표현이고 보호, 존경, 책임,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 의해 야기된다는 의미에서의 '감정'이 아니라 사랑받는 자의 성장과 행복에 대한 능동적 갈망이며, 이 갈망을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근원이 있다.
분리의 체험과, 여기서 생기는 분리 상태의 불안을 합일의 경험에 의해 극복하려는 욕구가 사랑에 대한 우리의 욕구의 기반이다.
인간 역사의 시초에 인간은 자연과의 본래의 합일로부터 내던져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이러한 원초적 결합에 집착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힘과 기술을 자신이 만드는 사물에 투입하며, 따라서 소외된 형식으로 자신의 솜씨와 자시의 소유물을 숭배한다. 더욱 발달된 단계에서는 인간은 신에게 인간의 형태를 부여한다.
부계사회는 사유재산의 발달과 병행한다.
근대 자본주의는 원활하게 집단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 더욱 많이 소비하는 사람들 그리고 취미가 표준화되고 쉽게 예측 가능한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현대인은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지 못할 때에는 무엇인가를, 곧 시간을 잃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얻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지 못한다. 시간을 허비하는 것 말고는
내가 자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집착한다면, 그 또는 그녀는 생명을 구조하는 자일 수는 있지만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조건이 된다.
곧 사람은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사람은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 없이 자기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사랑이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 인간의 행복은 '즐기는 데' 있다. 즐긴다는 것은 '만족스러운 소비'를 말하고 상품, 구경거리, 음식, 술, 담배, 책, 영화 등을 '입수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이 소비되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