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의 징조

Day7

by 이지선

현실 이야기


방금 나간 환자와 관련된 논문을 꺼내 읽으려 했다.
하지만 글자가 붕 떠올랐다.
문장들이 종이 위에서 흩어지더니,
나는 읽기를 포기했다.


환자가 들어왔다.
조명은 평소보다 유난히 어두웠다.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인데,
오늘은 차트 외의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목소리와 표정은 낯선 그림자처럼 흘러갔다.


어느 순간, 환자가 나를 관찰하는 듯했다.
나는 말을 했지만, 그가 기록하는 듯했다.
진단하는 내가 환자가 되고,
진료받는 내가 의사가 되는 기묘한 교차.


문득, 나는 글자를 읽는 게 아니라
글자에 읽히고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관찰하던 내가 관찰당하고,
진단하던 내가 진단받는 듯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꿈속 이야기

끝이 보이지 않는 도서관.
책장은 하늘까지 솟아 있었다.
사다리는 구름 너머로 이어졌다.
올라갈수록 바닥은 멀어지고, 세상은 아득해졌다.


겨우 손에 닿은 책.
무거웠다. 돌덩이처럼, 심장처럼.

책장을 펼치자,
모든 책은 거울처럼 나를 비췄다.
글자는 유리 뒤 멀리서만 흔들렸고,
읽으려 할수록 더 멀어졌다.


나는 거울 속 얼굴을 따라가려 했지만
그 얼굴은 같은 공간의 내가 아닌 듯 낯설었다.
겹쳐 있으면서도, 닿을 수 없었다.


책장은 미로였다.
닫으면 다른 책이 열렸고,
나가려 하면 새로운 서가가 나타났다.
수천 개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모두 내 눈 같았지만, 내 눈이 아니었다.


끝이라고 믿은 순간,
또 다른 사다리가 나타났다.
이번엔 위가 아니라, 아래로 향했다.


경계 노트

읽을 수 없는 글자.
너무 많이 비추는 거울.
의사가 환자가 되는 순간,
책이 독자를 읽는 순간.

균열은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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