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무
치유자. 동행자. 증인. 사제. 인간. 꼬봉. 벽. 장부. 시선. 그리고 이제, 책무.
아홉 개의 한계를 지나왔다. 마지막 열 번째 한계는, 그 모든 무게를 짊어지는 일이다. 책무는 단순히 해야 할 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이유이고, 쓰러지지 않기 위해 발을 굴리는 페달이다.
아침마다 흰 가운을 목에 묶는다. 가운의 무게는 천 조각이 아니라 수많은 이름의 무게다.
왼손 엄지가 욱신거린다. 환자의 관절을 잡던 손이 이제는 환자로서 수술 자국을 지닌 손이 되었다.
"선생님도 아프세요?" 환자가 내 손을 본다. 그녀의 손가락은 더 휘어졌으면서도.
"괜찮습니다." "저도요."
짧은 대화 속에서 서로의 거짓말을 안다. 괜찮지 않음이 우리의 진실이자, 견디게 하는 연대다.
토요일 오후. 8살 아이가 작은 흰 가운을 입고 진료실을 뛰어다닌다. 청진기를 목에 걸고, 초음파 기계 앞에 서서 묻는다.
"여기가 아픈가요?" 인형의 가슴을 톡톡 두드리는 작은 손.
아이의 아버지가 웃으며 말한다. "선생님 덕분에 애가 꿈이 생겼어요."
나는 셔터를 눌러 그 순간을 남긴다. 언젠가 이 사진 속 아이가 더 나은 약을, 더 나은 제도 속에서 누군가를 진료할 날이 오길 바라며.
이 병원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12명의 직원에게는 일터이자 생계이며, 2000명의 환자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자 일상의 쉼터다. 작은 건물이지만, 이곳에서 수많은 인생이 교차한다. 나는 그 무게를 매일 껴안는다.
후원하는 세 아이가 있다. 얼굴도 모르는, 이름만 아는 아이들. 편지 속에는 또박또박한 글씨가 적혀 있다. "덕분에 학교에 다녀요."
나는 답장을 쓴다. "꿈은 바뀌어도 된다. 실패해도 된다. 다만 포기하지는 마라."
편지를 쓰다 문득 멈춘다. 이 말은 그들에게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하는 말이다.
완치의 꿈은 동행으로 바뀌었고, 치유의 꿈은 기록과 증언으로 바뀌었다. 한계를 만날 때마다 꿈의 모양도 바뀌었다.
의료란 환자의 병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다. 지역사회를 지탱하고, 제도를 유지하고, 의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 또한 우리의 책무다. 나는 그 무거운 바퀴의 한 톱니로 살아간다.
한계는 페달이다. 멈추면 쓰러진다.
매일 같은 병을 본다. 매일 같은 약을 처방한다. 매일 같은 한계에 부딪힌다.
그런데도 페달을 밟는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내일을 조금이라도 밝히기 위해서다.
"왜 계속 미시나요?"
그는 아마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이게 내 돌이니까."
나도 그렇다. 이게 내 페달이고, 내 환자이며, 내 삶이다.
왼손은 여전히 아플 것이다. 병원에는 또 다른 아픔들이 찾아올 것이다. 시선은 여전히 나를 해부할 것이다. 숫자는 내 하루를 측정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그 안에서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문을 열 것이다. 첫 환자가 들어올 것이다. 나는 묻고, 듣고, 잡아줄 것이다.
의사는 대개 한다. 해야 하니까가 아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니까. 그것이 나의 책무이니까.
페달은 계속 돌아간다. 오늘도, 내일도. 그 길 끝에서, 누군가의 웃음을 만나기 위해.